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퇴계 이황을 찾아서4

이효범 2023. 3. 21. 08:16

o (9) 퇴계 이황을 찾아서 4

 

구녕 이효범

 

퇴계는 정통 정주학(程朱學)의 계통을 따라서 그의 리기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항시 리우위설(理優位設)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다. 퇴계는 리의 구극성을 말한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학문과 도술이 다른 까닭은 오직 리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것은 지극히 허()하지만 지극히 실()하고, 지극히 없는 것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이다. (---) 능히 음양, 오행, 만물, 만사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여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런 리는 만유(萬有)를 명령하지만(命物者), 만유에 의해 명령받지는 않는다. 그래서 퇴계는 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중요시하여, 리존설(理尊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서 퇴계보다 앞서 산, 기생 황진이가 그토록 사모하였던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은 기()에 치중한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기의 본체인 태허(太虛)를 말한다. “태허는 맑고 무형하니 이름을 붙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 그리고 기의 작용면을 말한다. “(이러한 태허의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홀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치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 화담은 기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뿐이라고 주장한다. 기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항존(恒存)한다. 그래서 화담은 주기론자(主氣論者)로서, 이치라는 것도 다만 기의 작용에 있어서 기 자체의 자율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기를 떠나서는 진리를 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성리학에서는 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만물을 설명하고 있는데, 화담은 주기(主氣)를 주장하고, 퇴계는 주리(主理)를 주장한다. 왜 퇴계는 이렇게 리만을 중시하고 강조했는가? 퇴계는 세계를 대립적 구조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사단/칠정, 도심(道心)/인심(人心), /기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서로 대립된다. 이에 반해 율곡은 세계를 통합적 구조로 파악했다. 율곡은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보았고, 도심과 인심도 근원은 하나인데 흘러서 둘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전화(轉化)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퇴계의 리기호발설을 부정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였다.

 

17세기 이후 영남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퇴계를 옹호하며, 율곡이 주장한 천지의 변화에는 두 가지 근본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의 발동에는 두 개의 근원이 없다. 인심과 도심은 비록 두 개의 이름이지만 그 근원은 단지 한 마음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를 비판한다. “어찌 음양과 태극이 끝내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분이 없고, 인심과 도심이 과연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근저와 묘맥이 없겠는가?”

 

원래 인심’ ‘도심이라는 말은 서경[대우모편]에 나온다. 순이 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성을 다하고 하나에 집중해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도심과 인심을 뚜렷이 구분하여, 오직 도심으로 중심을 잡고 성실하게 행하여야, 사물에 가장 합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심은 도의를 행하기 위해 발용한 마음으로, 예를 들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자 하고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인심은 신체상의 욕구에서 발용한 마음으로,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마음이다. 도심은 도의로 인해 감발된 마음으로 순수한 천리(天理)의 소산이므로 순선하다. 인심은 형기(形氣)로 감발된 마음으로 천리의 면과 인욕의 면이 함께 있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율곡은 인심을 처음에 가졌다가 도심을 갖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마음이 성명(性命)의 바른 데서 바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혹시 순하게 선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고 여기에 사의(私意)가 섞이게 된다면, 이는 처음에 도심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인심으로 마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처음은 도심이었다가 나중에 인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형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바른 이치(正理)에 거스르지 않으면, 진실로 도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며, 혹시 정리(正理)에 거슬렸으나 정리에 거슬린 것이 좋지 않음을 알고 제복(制伏)하여 그 욕()을 따르지 않으면, 이것이 처음에는 인심으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 도심이 되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도심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존양(存養)하여 확충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인심으로 바뀌어 질 수 있으며, 인심으로 시작했어도 절제(節制)하면 끝에는 도심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보는 세계는 율곡과 다르다. 그는 그가 사는 세계를 무도(無道)한 세계, 도회(韜晦)’의 시대라고 보았다. 인심은 도심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인욕(人欲)에 더 가깝다. 인욕이 지배하는 세계는 천리(天理)가 숨쉴 공간이 없다. 홉스의 표현대로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의 대상이 된다. 기는 악은 비록 아니지만 순수한 리를 은폐하고 훼손시킨다. 이제 믿을 것은 리뿐이다. 기가 발현되어 리가 타는 세상이 아니라, 거꾸로 리가 발현되어 기가 따르도록 해야 세상이 바로 잡힌다. 그것을 퇴계는 리발기수지(理發氣隨之)’라고 했다. 그래서 퇴계는 끝내 리발설(理發說)’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