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인생의 정점)

이효범 2020. 6. 20. 09:11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인생의 정점)

 

구녕 이효범

 

나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대전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제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좋아져서 그 51회 동기들은 여러 카톡방에서 다양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 중 詩花房에 올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늘 우리 시대의 율곡이라고 칭송하는 우리 친구 觀山 곽신환교수가 이번에는 夏至를 앞두고 정약용의 시를 우리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月於三十日 得圓纔一日 日於一歲中 長至亦纔一 衰盛雖相乘 盛際常慓疾

(달은 삼십일 동안에, 둥근 것은 겨우 하루, 해는 일년 동안에, 가장 긴 날이 겨우 한번, 성과 쇠는 비록 서로 이어지나, 성할 때는 언제나 후딱 지나가지)“

 

그러면서 관산은 감상을 덧붙혔습니다. “약용의 마지막 싯구처럼 우리들 삶의 하지, 우리들의 盛際는 후딱 지나갔다. 담아 채움에서 이제는 꺼내어 비움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감상은 이제 사회에서 은퇴하고 머지않아 70세를 바라보는 우리들 모두가 느끼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 송영각장로는 다산의 시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공감하면서 과연 우리들 성제는 언제였었지?”하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나도 똑같은 심정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사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보다 높고 넓은 사랑의 보살핌을 받았고, 선생님들로부터 교육을 잘 받아 동물로서는 결함이 많은 인간의 본능을 보충하여, 한 세상을 그런대로 큰 탈 없이 살아왔습니다. 분명히 보이지 않게 하느님의 가피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여 가장으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었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원했던 목표를 이루어 인생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그와 정반대로 후회와 자괴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우리의 왕성한 시절이 지난 것은 분명합니다. 둥근 달은 지고 있고, 이 가득한 하지는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인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과거나 반추하고 일상의 소소한 것에 빠져 즐거움을 누리는 餘生에 불과한가요. 가을이 오면 왕성했던 푸른 나뭇잎도 단풍으로 몸을 가볍게 단정하고 홀가분하게 지상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듯,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삶의 방식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산도 현실 정치에서 승승장구 했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런 위대한 정약용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랜 유배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을 다산의 높고 깊은 문화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토인비는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創造的 소수는 前進隱退라는 삶의 형식을 반복한다고 하였습니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보더라도 한 사람이 계속해서 성공할 수만은 없습니다. 실패의 시기, 은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그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남이나 운이나 시대에게 돌리고 허송세월로 시간을 죽인다면, 두 번 다시 만회할 절호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인기가 많은, 풍족하고 바쁜 삶에는 진정으로 만민을 위할 수 있는 그런 생생한 창조성이 깃들기 어렵습니다. 살아생전에 주어진 사회적 성공들은 대부분 표피적인 영광일 뿐입니다. 그런 출세들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잊혀지고 맙니다. 오히려 사람은 음지에 낮게 거하면 양지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생명력을 볼 수 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한적하고 외로운 생활은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되고 쉽고,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 펴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전진과 은퇴의 모습은 다릅니다. 공자는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였지만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은퇴하여 泗水江가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할 때 그의 진면목이 들어날 수 있었습니다. 거꾸로 우리 고향 출신 만해 한용운은 오히려 젊은 날 백담사에 은적하면서 內功을 쌓았고, 그 힘으로 41세 때 3.1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일념으로 불교쇄신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제 사람이 120세까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수가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아직까지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면, 어쨋튼 이런 변화에 대비해야 할 겁니다. 앞으로 남은 5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우리 사회가 배당하고 요구한 일정한 역할에서 물러난 지금이야말로 다산처럼 스스로를 유폐시켜 심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60년 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권력과 명예와 돈과 여자 같은 외적인 가치들은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예술적인 가치, 도덕적인 가치, 학문적인 가치, 종교적인 가치가 나를 새롭게 사로잡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런 眞善美스러운 세계에 몰두하여, 인생의 전반부 산에 오르면서 미쳐 보지 못한 꽃들을 인생의 후반부 산을 내려오면서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요즈음 책을 읽을 때나 관심 있는 사람의 행적을 살펴볼 때 그들이 몇 살 때 그 책을 썼으며 그런 놀라운 행실을 수행했는가를 일부러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런 업적들이 대부분 지금의 나의 나이보다 어릴 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상반된 마음이 듭니다. 하나는 그들보다 내가 얼마나 우둔하고 인생을 헛살았는지를 자각하고 머리를 기둥에 박고 가슴을 치며 자신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젊은 그들을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유를 갖고, 인생을 더 오래 살고 있는 내가 그들이 잘못 보았거나 가려져 있어 보지 못한 부분들을 볼 수 있다는 안도와 위안을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인생의 盛際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지구가 정말로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였습니다. 지식은 단 하루 만에 역사 이래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식들보다 더 많은 양을 폭발적으로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년이 지금까지 인류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런 도전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생겼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20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