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 2023. 2. 15. 06:55

(7) 자사를 찾아서3

 

구녕 이효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용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유가들은 왜 중용에 따라 살라고 하는가? 그것은 중용이 어떤 이로움()이나 유용성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하늘의 도(天道)가 중용이기 때문이다.

 

중용의 첫 구절은 유명하다. “하늘이 부여한 것이 성이고, 성을 따르는 것이 도이고, 도를 닦는 것이 교육이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참으로 논리적이며 신비적인 글이다. 이것을 논어의 첫 구절과 비교해보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不慍不亦君子乎)” 참으로 논리정연하며 일상적인 글이다. 사람이 학문을 배워,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쁠 것이다. 그런 학문을 사랑하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는 먼데서 친구가 찾아올 것이고, 그들과 학문을 논할 수 있다면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나를 비난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성내지 않을 수 있는 인품을 가졌다면, 그것은 학문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가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공자의 대의가 이 문장 속에 집약적으로 잘 들어나 있다. 그러나 중용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중용은 사람의 본성이 하늘이 부여(명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은 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도 선하다. 유교는 순자 같은 사람이 있기는 해도, 성선설(性善說)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맹자는 사단(四端)으로 입증하려고 한다.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의 단서가 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늘로부터 본성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 시경에 나오는 이 구절을 중용의 저자는 천하 만물이 충만한 도의 유행(流行) 속에서 본래의 성품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주자는 이런 본성을 리()로 본다. 성즉리(性卽理)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의 유학은 성리학(性理學)의 시작이다.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온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본성대로 살아가면 된다. 본성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처럼 남을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유교에서 말하는 천()이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주자처럼 천을 천리(天理)로 보든, 아니면 다산 정약용처럼 상제천(上帝天)의 천명(天命)으로 보든, 그것은 바로 인성(人性)이기 때문에, 인간은 천리나 천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

 

칸트의 묘지명에는 그의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한 유명한 구절이 적혀 있다. “ "오랫동안, 그리고 거듭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감탄과 경외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별이 총총한 내 머리 위의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이 바로 그것이다.” 칸트는 도덕법칙을 지키려는 선의지(der gute Wille)’ 즉 착한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도덕법칙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선의지가 없다면 어떤 구체적 행위가 옳은지, 그리고 도덕적 의무라는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있어서 또는 이 세상 밖에 있어서까지 라도 선의지 이외에는 무조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선의지의 실현이다. 칸트나 기독교나 유교는 도덕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명령을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영국의 공리주의(功利主義)처럼 자기 삶의 목적이나 이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