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 2023. 2. 14. 07:04

(7) 자사를 찾아서2

 

구녕 이효범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쓴 주자는 서문에서 도통(道統) 이야기를 한다. 전설적인 중국 성왕인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정성을 다해 그 중도를 지켜 나가라.” 라고 말한다. 이제 순 임금은 다시 우 임금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잘 드러나지 않으니, 정밀하게 살피고, 도심을 한결같이 보존하여 정성을 다해 그 중도를 지켜 나가라.”라고 당부한다. 그러므로 유학에 의하면 중도(중용)는 제왕이 천하를 통치하는 준칙 그리고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적 법칙이다.

 

주자에 의하면 중(), 치우지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는 것이며(不偏不倚), 지나치거나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無過不及). 그리고 용()은 공평하고 떳떳한 것이다(平常). 정자(程子)는 말했다. “치우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중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용이라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다.” 갑골문에서 이라는 글자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깃대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형상이다. 이것은 중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의 의미를 지닌 동시에, 실력이나 재주가 막상막하라는 백중(伯仲)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공자는 중용2장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를 말한다. “군자는 중용을 실천하고, 소인은 중용과 반대로 행동한다. 군자가 중용을 실천한다는 것은 군자의 덕을 갖추고서 상황에 적절하게(時中) 행동하는 것이고,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소인의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용은 시중을 의미한다. 맹자는 공자를 시중지도(時中之道)를 실천한 성인으로 평가한다.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두어야 하면 그만두었으며, 오래 머물러야 하면 오래 머물렀고, 빨리 그만두어야 하면 빨리 그만둔 인물이 공자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공자는 군자는 세상일에 대하여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없고,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없이, 오직 도의에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무조건 아니라고 반대하거나, 언제나 아첨하여 무조건 긍정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적절히 대처한다는 시의성(時宜性)으로서의 중용은, 융통성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권도(權度) 개념과 연결된다. 생명의 가치를 중시한 양주(楊朱)는 털 하나를 뽑아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위아주의(爲我主義, 利己主義)를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묵자(墨子)는 유교의 차별적인 사랑에 반대하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마가 닳고 발꿈치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천하가 이롭다면 그렇게 하였다. 이에 맹자는 양주의 이기주의는 군주를 무시하는 것이고, 묵자의 박애주의는 부모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름 아닌 금수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양 극단에 대해서 자막(子莫)은 중간을 고집하였다. 이에 맹자는 중()을 취하되 권도(변통)가 없으면 그것은 승냥이나 늑대 같은 자로, 하나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고 질책하였다. 권도란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 구하는 것과 같다. 남녀가 직접 손을 잡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이런 경우까지 융통성 없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맹자가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을 극히 미워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만을 치켜세우다가 백을 버리게 되어 도를 그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말한다. “권은 저울의 추로서 물건의 가볍고 무거움을 달아서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다. 가운데를 잡지만 권이 없으면 하나로 정해진 가운데에 교착하여 변함을 알지 못한다. 이 또한 하나를 고집하는 것이다. 가운데를 고집하는 것은 시중(時中)에 해가 된다. (...) 도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중이며, 중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권이다.”

 

유학이 강조한 이런 중용의 가치를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삶에는 분명히 목표가 있고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인간의 궁극 목적이고 최고선(summum bonum)이다.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탁월함)이 필요하다. 덕에는 이론적인 덕과 실천적(도덕적)인 덕이 있다. 이론적인 덕은 관조적 내지 이론적 삶의 탁월성이다. 관조를 통해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통찰한 진리를 조용히 사색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실천적인 덕은 품성의 탁월성이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적 상황에서 중용을 실천한다면 성격이 고귀해질 수 있고, 그러면 결국 행복해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덕은 용기, 절제, 관후, 긍지, 온화, 재치, 우애, 정의 등 많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포에 빠져 햄릿처럼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거꾸로 돈키호테처럼 만사에 두려움 없이 무모하게 덤벼들어 만용을 부릴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도덕적 의미를 직관하고 올바르게 추론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분별하여,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중용이고 이런 중용의 덕인 용기가 몸에 밸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용기인지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점을 시인한다. “덕을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있어서나 간에 그 일의 핵심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의 중심을 발견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원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으며 돈을 남에게 주거나 아낌없이 쓸 수 있는데, 이런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꼭 주어야 할 사람에게, 적당한 양만큼, 꼭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미덕은 드물며 또 상찬할 만하고 고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