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서3

이효범 2023. 1. 11. 07:47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서3

 

구녕 이효범

 

후기에 와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그림이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버렸지만, 이 이론이 내포하는 중요한 점은 이른바 지시 의미론(referential theory of meaning)이다. 이것은 언어의 유일한 기능은 어떤 대상을 지시(指示) 혹은 서술(敍述)하는데 있으며, 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라는 말(단어)의 의미는 구체적인 소의 대상(사물)에 불과하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안다는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대상인 구체적인 소가 무엇인가를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가 발이 넷이다라는 말(명제)의 의미를 안다는 뜻은, 그 명제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소가 내 개의 다리를 갖고 있나, 있지 않나를 가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은 이렇게 세상을 서술(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세상을 정확히 기술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함께 기호논리학을 기반으로 해서 인공적(人工的)으로 이상언어(理想言語)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프레게는 인공 언어를 일상 언어보다 더 훌륭한 언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두 언어의 관계를 현미경과 우리의 눈과의 관계로 비유한다. 생물학적 탐구를 위해서는 현미경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현미경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그렇듯이 일상 언어는 문장(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부적합하지만, 일상 언어는 인공 언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공 언어가 일상 언어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도 후기에 와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공 언어의 꿈을 접었다.

 

언어의 의미와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면 전통적으로 제기되었던 철학적 문제들이 사실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고, 사이비 문제(pseudo problem)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했다. 지난 철학자들은 잘못된 언어관에 빠져 허우적댔다. 파리가 파리통에 들어가면 파리통을 정확히 파악하여 들어온 길로 다시 나오면 문제가 없는데, 파리통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다가 그만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렇듯이 철학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면, 철학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라 해소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논고로 더 이상 철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만만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는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고, 그 세상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는 논고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말할 수 없는 세상, 즉 세상 밖을 말하려고 하는 말들은 모두 무의미(nonsense)하다. 그런 말들이 형이상학, 신학, 윤리학, 미학의 말들이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1924년 경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등 그들은 논고를 탐독했다.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도 철학적 사명은 궁극적 실재(實在)를 밝히거나 절대자를 파악하는 일이 아니고, 사상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명백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사명의 달성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언어의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짜 지식(학문)과 사이비 지식(학문)을 구분하려고 했다. 더러워진 학문을 목욕시키려고 한 것이다. 지식은 명제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사실을 나타내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의미가 있는 명제(발언, 판단)와 무의미한(meaningless) 명제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검증원리(principle of verifiability)’를 고안해내었다. 검증원리는경험적 관찰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는 명제만이 의미 있는 명제이다라는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라 의미 있는 명제(meaningful proposition)는 첫째, 진위(眞僞)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들이다. 자연과학의 명제들, 일상생활의 명제들 즉 사실적 진술들(factual statements)이다. 둘째 진위를 정의(定義)에 의거하여 분석적으로 밝히는 명제들 즉 항진(恒眞)명제(tautology)들이다. 논리학과 수학의 명제, 그리고 기호에 대한 정의들이 이에 속한다. 이것들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7+5=12’ 와 같은 비사실적 논리적 진술들(nonfactual logical statement)이다. 그 밖의 발언은 난센스 한(nonsensical) 발언이다. 이것들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무의미하기 때문에 철학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우주의 목적 등을 논하는 형이상학과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악이다와 같은 도덕 판단들로 되어 있는 윤리학 그리고 미학이나 신학은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다. 이런 학문의 진술들은 토톨로지도 아니고, 검증가능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세계 내의 경험계의 현상을 서술하지도 않고, 어떠한 사실도 알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당신들이 금과옥조처럼 자랑하는 검증원리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그것도 결국 검증할 수 없다면, 무의미한 원리 아닌가? 무의미한 원리로 어떻게 지식을 목욕시키려고 하는가? 이런 비판은 비트겐슈타인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논리 실증주의자는 꼭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검증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경찰관이 그 지역 개개인의 주민들로부터 정보(말하자면 나이가 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얻어야 할 마을이 있다. 이 정보에 대한 기록은 보관되며 때로 사용되기도 한다. 경찰이 주민에게 질문을 할 때 때때로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하는 사람일 경우가 있다. 경찰관은 이 사실도 기록해둔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유용한 하나의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실증주의처럼 여러 곳에서 윤리학과 미학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의미하다는 당신의 발언은 세계 내 사실인가 아니면 세계 밖 침묵해야 하는 것에 대한 발언인가? 그렇다면 발언하지 말라고 말해 놓고 당신은 왜 발언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곤혹에 차서 말한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 그 위에 서서 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것이다.”

 

이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불교적인 관점에서 나는 자신은 없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말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도로의 방향을 알리는 도로표시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론해본다. 달의 모습을 보거나 일정한 목적지를 가려면 우리에게는 손가락이나 도로표시판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엇인가를 지시할 뿐 무엇에 대해 말(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보고, 우리는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을 직접 보든가, 아니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지 말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