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찾아서4
(1) 소크라테스를 찾아서 4
구녕 이효범
사람은 우선 이성을 통해서 참다운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주로 ‘경건’이나 ‘정의(正義)’, ‘절제’, ‘용기’ ‘지혜’ 같은 도덕적 지식을 말한다. 도덕적인 지식을 알면 우리는 도덕적인 행동 즉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무지의 소치인 셈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당시의 아테네 사람들은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착각을 깨려고 등에(쇠파리)처럼 집요하게 그들을 괴롭혔다. 그는 그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저를 마치 이 등에처럼 이 나라에 달라붙어 있게 하여, 여러분을 깨우되, 하루 종일 어디서나 따라가서, 곁에 달라붙어, 설득하고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살인죄로 아버지를 고발하려고 하는 사제(司祭) 에우티프론을 붙잡고, ‘경건’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에우티프론은 그의 아버지가 고용한 노동자가 아버지의 노예 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노동자를 꽁꽁 묶어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 그 노동자는 죽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하면서, 자신은 경건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갑자기 소크라테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당황하여, 긴 설명을 전개한 후에, 결국 경건은 ‘신들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신들도 서로 다투기가 일쑤인데, 도대체 어느 신이 좋아하는 것인가?” 말문이 막힌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는 젊잖게 타이른다. “나는 그대에게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경건한 행위들을 나열하도록 요구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들을 경건하게 만드는 것 자체의 본질을 말하도록 요구한 것일세.” 이 말은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경건의 이데아, 즉 ‘경건’이라는 개념을 정의(定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소크라테스 본인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않는다. 사실 그도 경건의 본질을 모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에우티프론을 공격한 까닭은 에우티프론보다 더 근본적인 도덕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잘못된 확신을 비판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불러일으켜, 결국 에우티프론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서 더욱 현명하게 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어머니가 조산원으로서 산모들의 육체적 탄생을 도와준 것처럼, 아테네 시민들이 진정한 지식을 갖도록 산파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 점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 다른 점이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리나 도덕의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테나가 다시 부강하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절대주의의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소크라테스는 약관 20세 때 소피스트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환갑이 지난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갔다. 프로타고라스는 말했다. “모든 것은 나에게 나타난 대로 내게 있고, 너에게 나타난 대로 네게 있다. 그리고 너도 나도 인간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니, 존재하는 사물의 척도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확실한 것은 경험적인 사실밖에 없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나 행위의 기준은 없다는 뜻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만물의 척도는 개나 돼지가 아니고 왜 하필 인간이어야 하는가?’ ‘인간이 모두 만물의 척도라면 어리석은 사람들과 현자인 당신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록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인 당신의 척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