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찾아서2
(1) 소크라테스를 찾아서 2
구녕 이효범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긴 변론을 늘어놓는다. 출발점은 ‘죽어 있다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가정은 옳지 않다’라는 가치판단으로 구성된다. 그는 죽음이 어떤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죽음에는 내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해서 사는, 두 가지 가능성만 남아있다. 그런데 첫째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음(非存在)’을 의미하는 경우에는, 죽음은 가장 편안한 잠이라고 알려진,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죽음 후에 살아남는 경우에는, 저승에서 정의로운 심판관을 만나서 죽은 영웅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기쁘다는 것이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것이 믿기어지지 않던 소크라테스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를 실험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무지(無知)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그런 소크라테스는 죽은 후에 호메로스나 오디세우스 같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그는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기꺼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저에게는, 제가 이미 죽어 귀찮은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논변으로 볼 때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영혼불멸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제자 플라톤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전한 플라톤은 이원론자(二元論者)이다. 그는 영혼과 육체를 대립시킨다. 육체는 변화하고 사라지는 세계이다. 그러나 영혼은 불변의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우리가 죽은 뒤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천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심판의 장소로 가는데, 물질적인 것에 아직도 애착이 남아 있는 영혼은 지난 과거의 삶을 잊어버린 채 다시 환생하고, 철학으로 자신을 정화한 영혼은 “육신 없이 지상의 집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집에서 산다.” 그래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육체뿐이고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영혼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기를 배우고, 이 육체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평온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한다. 철학자는 죽지 않는 이데아들 가운데서 살기 위하여 이 감각적인 세계, 동굴 속과 같은 착각의 세계,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에서는 죽어야 한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영혼은 죽지 않고, 육신을 떠난 뒤에 신과 통일될 것이므로 죽음은 악(惡)이 아니다. 죽음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철학자의 오랜 여정의 끝이자, 신을 향한 탐구가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기쁘게 떠나지 않을 것인가? 분명 기쁘게 떠날 것이다. 그가 진정한 철학자라면.” 이런 죽음관을 가졌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기 철학이 자기의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