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에 관한 좋은 문장들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6

이효범 2022. 10. 13. 11:41

어린애들이 법이 정하는 바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나이에 미달했을 때에는, 어머니들에게 집안일 처리를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지각이 좀 못한 터인데, 아이들이 이미 나아에 도달해서도 자기 아내보다 더 총명하게 처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면, 부친들이 그들을 잘못 기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모친을 아이들의 손에 매여 지내게 하는 것은, 극히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곤궁하고 부족한 생활을 견디기에 적당치 않은 점으로 보아서, 여자들에게는 집안 형세와 나이에 따라서, 지체를 유지하기에 족할 만큼 넉넉하게 재산을 남겨주어야 할 일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죽을 때에 재산을 가장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법은, 재산을 자기 나라의 관습에 따라서 분배하게 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률은 이점을 우리보다 더 잘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가 독단적으로 실행하다가 실수하는 것보다는, 법률이 정하는 방법에 따르다가 실수하는 편이 낫습니다. 재산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민법상의 규정은 우리의 의견을 참작하지 않고 재산을 일정한 피상속자에게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규정을 넘어서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자유를 가졌다 해도, 신분상 재산을 받게 되어 있고, 통념상 주기로 되어 있는 자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는 데는 중대하고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 재산 처리에 관한 자유를 개인감정으로 경박하게 제멋대로 행사하는 일은, 이 자유를 부당하게 남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다행히도 내게 이런 유혹으로 일반적이며 합법적인 규정에서 일어나게 하는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노인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극진히 봉사하는 것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예를 자주 봅니다. 악의를 가지고 슬쩍 한마디 들려 준 것으로, 10년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마침 숨이 넘어갈 무렵에 비위를 맞춰주는 자가 요행을 얻지요! 마지막에 해 준 행위가 승리합니다. 가장 열심히 한 봉사 보람이 오는 것이 아니고, 가장 최근에, 당장 그 자리에서 해주는 행위가 효과를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기에 이해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지고 상을 주거나 징벌을 주려고 유언으로 노름을 하는 수작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순간마다 이리 끌리고 저리 꿀리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중대하고, 먼 훗날까지 영향이 미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자들은 이런 일을 이성의 판단과 공적인 관습에 비추어서 단호하게 결정합니다.

우리는 남자에게 하는 대를 잇는 상속을 너무 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 족보를 영구히 지속시키려는 것은 우스운 생각입니다. 우리는 유치한 관념으로 미래에 관한 헛된 추측을 너무 중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정신의 훈련에서나 동작이 무겁고 둔해, 내 형제들뿐 아니라 시골 아이들보다 공부하는 데 시일이 더 오래 걸렸고 싫증을 냈다고 해서, 미리 내 신세를 현재의 지위에 있지 못할 것으로 정해 놓는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를 잘 속여 넘기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신수를 결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만일 우리가 규칙을 어기고 점을 쳐서 나오는 쾌에 따라 상속자를 정하고 사람의 운명을 변경시켜도 좋을 것이라면, 차라리 신체에 너무 심한 장애가 있다든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악덕이 있다든지, 또는 미의 위대한 감식가로 자처하는 우리들로서 극히 중대한 결함을 고려해서 피상속자를 변경하는 편이 더 사리에 맞게 보일 것입니다.

플라톤에 나오는 입법자와 그의 시민들과의 재미나는 대화는 이 조항에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 시민들은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며 어째서 우리 것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한단 말이오? 이런 참! 집안사람들이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가 늙었을 때, 우리가 일을 처리할 때, 우리를 섬겨 준 공에 따라서 어느 정도 우리 마음대로 그들에게 재산을 줄 수 없다니, 이런 잔혹한 일이 어디 있소?” 하자, 이에 입법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자네들은 얼마 안 가서 죽게 되었으니, 델포이 신탁의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에 따라서 그대들이 자신을 안다거나 그대들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법을 만드는 나로서 보면, 그대들이 그대들 것이 아니며, 그대들이 누리는 것도 그대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대 재산이나 그대는 똑같이 과거에나 미래에나 그대 가족의 것이오. 그보다도 그대 가족이나 그대 재산이 똑같이 국가의 것이오. 따라서 만일 그대들이 늙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또는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어느 아첨꾼들이 그대에게 당치 않게 부당한 유언을 해달라고 간청핟다면, 내가 그것을 못하게 막겠소. 반대로 국가공동의 이익과 그대 가정의 이익을 고려해서 나는 법을 세우며, 이치에 맞게 개인의 편익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겠소. 인간의 요청이 그대에게 호소하는 바에 따라서 호의를 가지고 순하게 물러가시오. 나는 어느 한 일을 다른 일보다 더 중하게 여기지 않는 처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체를 보살피는 터이니, 그대가 남겨두고 가는 재물을 처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오.”

다시 우리 화제로 돌아와서, 나는 웬일인가 모르지만, 어미의 지배나 또는 타고난 신분에 의한 것을 제하고는, 또 남자들이 흥분한 마음으로 자신해서 여자들에게 굴복하여 벌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자들을 지배할 권한은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여자들에게 돌아갈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늙은 여인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이러한 고찰이 정당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제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일이지만, 강제로 여자에게 이 나라 왕위를 계승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에 기꺼이 근거를 주게 하였으며, 세상의 어느 왕국에서도 여기서와 같이 이 법에 권위를 주는 지당한 이유가 주장되지 않는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운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보다 더 신용을 얻고 있습니다.

아이들 중에서 선택하여 상속 재산을 배정하는 일을 여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 판단은 어느 때나 변덕스럽고 공평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잉태하였을 때의 무절제한 욕망과 병적인 취미를 어느 때나 그 정신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가장 약한 자, 또는 못난 자들에게 애정이 쏠리며, 아직 목에 매달려 있는 자가 있다면 그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골라야 할 만한 자를 골라잡을 충분한 판단력을 갖지 못하고, 그 마음에 유독 인상이 남는 편으로 이끌려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동물들이 새끼가 젖꼭지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는 제 새끼 밖에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상 그렇게 권위를 세워주는 타고난 애정이라는 것도 그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극히 변변찮은 이득을 주어 어미들 품에서 그 어린아이를 밀어내고 우리 어린아이를 맡깁니다. 그녀들은 자기 아이를, 우리가 아이를 도저히 맡기고 싶지 않은 다른 허약한 유모나 염소에게 맡겨서 젖을 먹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자기 아이에게는 자기 젖을 빨리지 않을뿐더러, 우리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자기 아이는 전혀 돌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의 대부분은 얼마 안 가서 습관으로 남의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자기 아이에 대해서보다 더 맹렬해지며, 자신의 아이보다도 맡아 길러온 아이를 살리려는 데 더 큰 열성을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염소에 관해서 말한 바는, 우리 집 근처 시골 여자들이 자기 젖꼭지로 어린아이를 기르지 못할 때에는 보통 염소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집에 있는 하인들은 한평생 8일밖에는 엄마의 젖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 염소들은 바로 이 어린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러 오게 길이 들어 있어, 아이가 울면 그 소리를 알아듣고 쫒아옵니다. 그 염소는 자기가 젖 먹이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를 갖다 대면, 젖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도 다른 염소의 젖을 빨지 않습니다. 나는 지난 번 한 아이에게서 그 염소를 떼어 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웃 사람에게서 빌려 온 염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염소를 갖다 대었더니, 그 아이는 도무지 빨려고 하지 않고, 끝내는 그대로 굶어 죽었습니다. 짐승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쉽사리 타고난 애정을 옮길 수 있습니다.

헤로도투스가 리비아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거기서는 여자들과 무분별하게 육체관계를 맺으면, 어린아이가 걸음마할 때가 되면, 군중 속에 데려다 놓고 첫걸음이 향하는 자를 아비로 삼는데,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그것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다른 생산물들이 있으니 그것도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우리의 정신,마음,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우리 육체보다도 더 고상한 부분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더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산물에 대해서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그 생산은 아이낳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아이들의 가치는 우리보다는 차라리 여자들의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몫은 아부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 생산에서는 그 본래의 미와 우아성과 가치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더 생명 있게 우리는 대표하며 알려줍니다. 플라톤은, 이런 산물은 영생불멸의 아이들이며, 그 부친(작가를 말함)들을 영생불멸케 하고, 진실로 리쿠르고스나 솔론이나 미노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을 신격화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데 역사상에는 부친들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애정에 관한 이러한 공통된 예가 하도 많아서, 이런 것을 몇몇 골라보는 것도 격에 맞지 않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드리케아의 저 착한 주교님 헬리오도로스는 자기 딸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존경받는 사교직(司敎職)의 직위와 이익과 신앙생활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딸은 아주 얌전하게 지금도 살아있는데, 성직자인 사교의 딸로서는 너무 공들여 마음 녹이게 치장되어 있고 너무 사랑에 밴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로마에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기가 장하고 권세 있는 인물로 다른 소질보다는 문장에 능하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에 카이사르 휘하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있다가, 다름에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가서 카이사르가 스페인에 진격하여 그를 격파하기까지 너무나 용감하게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위대한 라비에누스의 아들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라비에누스에게는 그의 덕성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황제들의 궁신이나 총신들은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솔직성과 폭군 정치에 반항하는 기질을 좋게 보지 않았을 법한 일로, 그런 기분은 분장이나 작품에 배어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관청에 고발해서 출판한 여러 작품을 불태우라는 판결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형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실시된 것인데, 그것은 문장과 연구 논문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잔혹한 것을 할 방법과 재료가 부족해서 우리들 정신의 고안과 명성 같은 고통을 느낄 감각이 없는 사물에까지 미치며, 시신(詩神)들의 학문과 업적까지 물질적 고통을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이런 손실을 참고 지낼 수도 없고 그렇게도 소중한 작품을 잃은 뒤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무덤에 자기를 실어가게 해서 그 속에 들어가 산 채로 마묻혀 자실과 매장을 동시에 감행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맹렬한 애정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대단한 웅변가로 이 사람의 친구인데,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같은 판결문으로 자기도 함께 산 채로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고함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렌티우스 코르두스도 그의 작품에 브루트스와 카시우스를 칭찬했다고 고발당하여 같은 처단을 받았습니다. 저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쁜 상전을 섬겼던 저 천하고 비굴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그의 문장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저서와 동행하기에 만족하고,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저 선량한 루카누스는 극악무도한 네로에게 처단을 받아 행명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죽으려고 의사에게 끊게 한 팔뚝의 혈관에서 피가 대부분 흘러나와 사지의 끝은 이미 싸늘해져 가고 찬 기운이 생명의 심장부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자,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르살리아 전쟁에 관한 자기 작품의 시 몇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구를 마지막으로 소리쳐 읊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애정에 찬 정다운 작별 인사였으며, 죽어가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주는 굳은 포옹과 고별이었고, 이 최후의 순간에 살아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물들을 회상케 하는 타고난 경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의 말처럼 담석증의 극심한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갈 때에, 그가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학설의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위안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나 잘 자란 아들들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서 그가 풍부한 저작을 완성했을 때만큼 만족을 얻었겠습니까? 잘못 성장한 못난 아이나 어리석고 못된 작품 중의 하나를 죽은 뒤에 남겨두어야 한다면, 그 외에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불행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예를 들자면), 우리 종교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작품을 땅에 파묻거나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에 그 아이들을 파묻든지 하라고 제안했을 때에, 그가 차라리 아이들을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경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와 관계해서 잘난 아이를 얻는 것보다, 시신(詩神)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잘 생긴 작품을 하나 얻기를 훨씬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생긴 그대로 내가 여기 내놓은 젓은 마치 육체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고칠 수 없어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얻은 작은 재산은 이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충분히 사물들을 알고 있으며, 내게서 자신이 담아두지 못한 것을 가져갔으며, 아무 관계없는 딴 사람처럼 필요한 때에는 그에게서 빌려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작품보다 더 현명할지 모르나, 그는 나보다 더 부유합니다.

시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로마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소년을 낳기보다는 아에네이스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을 자 없고, 전자보다는 후자를 잃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작가들 중에서 특히 시인들은 자기 후손으로는 딸들만 남겨서, 그녀들이 다음에 조상들에게 영광을 주리라고 자랑하던 에파미논다스(이 딸들이란 그가 라케데모니아 인들에 대헤서 두 번 얻은 고귀한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가 그녀들을 그리스 전국의 화사한 미녀들과 바꾸었으리라고는 믿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자기 아들과 상속자가 아무리 완벽하고 완성된 인물이라고 해도,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공훈들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피디아스나 다른 탁월한 조각가들이 오랜 노력과 면학으로 예술적으로 완성해 놓은 탁월한 조각상이 잘 보존되어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랐을 만큼, 그가 낳아 놓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원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가끔 부친들이 자기 딸들에게 보이는 사랑이나, 모친들이 자기 아들들에 열중하던 악덕스런 미치광이 같은 태도와 사랑으로 말하면, 그런 예는 이 다른 종류의 부자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피그말리온에 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위하면, 그는 특별한 미를 갖춘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고 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들은 이 조상에 생명을 넣어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상아를 만지니/ 그것은 단단함을 잃고 유연해지며/그의 손가락에 눌려 들어간다.(오비디우스)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2, 8,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