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3, 공주에서 사는 일)
o 공주에서 사는 일
또박, 이효범
강에서 사는 일은 축복이다.
인류의 문명이 강에서 발원했기 때문이다.
나라의 수도에서 사는 일은 더 큰 축복이다.
민족의 자존심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영광이 지난 고도에서 사는 일은 최상의 축복이다.
별처럼 지혜가 반짝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나 스페인의 톨레도
일본의 교토나 한국의 공주.
패망한 눈물이 강물처럼 돌아 맑은 지혜로 솟아나는 곳.
우리가 사는 일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온전히 치유되는 것.
공주의 한옥 마을에서 자면 누구나 공주가 된다.
공주를 사랑하면 누구나 왕자가 된다.
후기: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공주를 닮은 도시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스페인의 톨레도, 포르투갈의 포르투, 프랑스의 아비뇽,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 스위스의 베른,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 일본의 교토 등등. 강을 낀 아름답고도 역사적인 도시들입니다. 지난 시대의 영광을 지니고 있지만 현대의 번영에서는 약간 비켜간 슬픔을 가지고 있는 고도들입니다.
광활한 지구 표면 위에서 아주 좁은 공간인 이런 도시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역사적 유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얻게 되는 利點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런 영광과 굴욕의 오랜 역사의 흔적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인생의 지혜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집안이 망했지만 이제 스스로 역경을 헤치고 반듯이 서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뼈대 있는 예쁜 신부처럼, 실패와 성공이 축적된 문화적 환경은 사람을 지혜롭게 성장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지혜롭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이 지혜롭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처럼 미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동물처럼 먹을 것만 찾지 않고 예의를 갖춘다는 말입니다. 예의라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가치나 덕이 실재한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덕 중에서도 正義(justice)를 가장 중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정의를 定義(definition)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콜버그(Kohlberg)라는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는 정의를 중심으로 인간의 도덕성이 6단계로 발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단계에서는 신체적으로 벌을 받는 것은 정의(도덕)가 아닙니다. 2단계에서는 정의가 힘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3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도와주는 행위가 정의가 됩니다. 4단계에서는 법을 따르는 것이 정의입니다. 5단계에서는 법적인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법이란 사회적인 유용성에 대한 합리적인 합의에 도달할 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단계에서 정의란 스스로 선택한 도덕원리에 따른 양심의 결단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조국 법무부장관후보자를 두고 나라 전체가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150년 전 조선 말기처럼 4대 강국이 그리고 거기에 더해 북한이 저렇게 이리처럼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이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시야를 외부로 돌려 독수리의 눈으로 날카롭게 경계를 보고 대책을 세워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대신에, 우리는 우물 속에서 서로를 익사시키려고 안달하고 있습니다. 조국후보는 검찰의 적폐를 반드시 청산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부립니다. 그러나 야당은 조국 자신이야말로 적폐라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조국 딸의 장학금 수혜 정도는 국민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는 가난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데,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첫 학기뿐만 아니라 2학기에도 1학기에 한과목만 듣고도 수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산대의학전문대학원에서는 유급했는데도 격려의 명분으로 무려 6번이나 줄곧 헤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특혜이지 공정한 정의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런데 조국 후보는 법에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변명합니다. 젊은 날 그는 사노맹 활동으로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딸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용이야 어떻든 법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처벌은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콜버그식으로 보면, ‘법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른 것이 아니다’ 라는 그의 항변은 낮은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콜버그에게는 길리건(C. Gilligan)이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는 정의지향적 도덕성보다는 대인지향적 도덕성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여성들은 정의보다는 인간관계를 고려하는 도덕적 사고를 더 중시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보살핌과 책임을 중시하는 길리건의 주장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性差를 넘어서 인간 모두에게 요긴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나 부처나 공자는 모두 정의보다는 사랑을 더 중시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을 고려하고 배려할 줄 모르면서 그리고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리더는 물론 중요한 공적인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됩니다.
젊은 날 의협심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의 이름으로 잔인한 복수가 되거나 자신의 권력에 대한 욕망만 만족시킬 때는 문제가 많습니다. 복수는 다시 복수를 불러오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쌓인 심각한 적폐나 커다란 악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누가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수 있고, 또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할 경향성을 지니고 태어났고, 악은 언제나 우리 주변의 일상 속에 상주하고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이 적폐를 청산 할 수 있다는 맹신이 사실 더 위험합니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독선은 더 큰 화를 불러옵니다. 겸손하고, 솔직히 과오를 시인하고, 국민의 뜻에 반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리해서 잠시 작은 성공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역사의 긴 안목에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숙고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좁은 우물 안에서 편 갈라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싸울 때가 결코 아닙니다. 조국은 大義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사퇴하여 국민들의 소모적인 분쟁을 종결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늦었지만 조국이 살고 우리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한치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국제 질서의 재편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기분입니다. 지난 평생이 비록 가난했지만 평화로웠기 때문인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우리나라가 계속 번영하고 우리 후손들이 안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길을 찾아 쉬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참다운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