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3대 미봉 트레킹(2)
o 알프스 3대 미봉 트레킹(2)
구녕 이효범
오늘부터 본격적인 알프스 3대 미봉 트레킹을 시작한다. ‘알프스 3대 미봉’은 스위스에 위치한 융프라우(Jungfrau, 4158m), 마테호른(Matterhorn, 4478m)과 프랑스에 위치한 몽블랑(Mont Blanc, 4810m)을 말한다.
트레킹(trekking)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사전에는 “심신수련을 위해 산이나 계곡 따위를 다니는 도보여행”이라고 나와 있다. 이 말은 ‘하이킹(hiking)’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러면 트레킹은 등산(climbing, alpinism), 달리기(running), 산책(stroll, jaunt), 걷기(walking)와 어떻게 다른가? 그 구별이 애매모호하지만,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걷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 성스런 행위라고 생각한다. 동물은 걷지 않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직립으로 걷는다. 돌이 지날 때 아기들은 혼신을 다해 일어서고 허공으로 한 발 두발 온 몸을 내던지며 뒤뚱뒤뚱 걷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눈물겨운 모습을 보고 ‘비로소 우리 아기가 동물로부터 사람이 되었구나’ 안심한다. 사람은 걸으면 살고 걷지 못하면 죽는다.
산책은 생각하기 위함이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은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덴마크의 코펜하겐,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 있다. 철학자들은 생각하기 위해 걷고, 걸으면서 생각한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산책을 평생 즐겼던 니체에게는 산책은 곧 구원이었다. 그는 도시와 사람들, 번잡한 세상을 멀리하고, 남프랑스와 생모리츠를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의 자연 속을 평생 걸으면서 명상하고 글을 썼다.
달리기는 위험한 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먹이를 잡기 위해 수행한다. 최초의 현생 인류인 아프리카의 호머 사피엔스들은 공동으로 사냥감을 잡기 위해 며칠 몇날을 걷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비호같이 달려들어 먹이를 덮쳤다. 달리면 우리 몸에서 열이 발생한다. 그것이 무더운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라면 더 치명적이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인류의 조상은 피부의 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털 없는 원숭이’가 된 것이다.
등산은 일정한 목적을 향한 도전과 극복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정상을 밟지 않는 것은 치욕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숨까지 건다. 그들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할까? 1924년,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보다 먼저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고 말해지는 조지 멀로니(George Mallory)는 “산에 왜 가느냐(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라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산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말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결국 거기에 있는 산을 정복하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갈 때 극도의 희열을 느낀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에의 본능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등산에 미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우리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트레킹이다. 그러면 얼마나 산이나 계곡을 걸어야 트레킹이 될까? 이것은 ‘어느 높이로 떨어져야 폭포가 될까?’와 같은 우문이 될 것이다. 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걷는 것 자체가 활기찬 경험인 트레킹을 양적으로 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트레크(trek)’의 어원은 남아프리카 원주민이 하루 동안 우차를 몰고 이동하는 거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15~20km를 걸으면서 야영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트레킹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두 가지를 섞는 바람에 본격적인 트레킹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조식을 풍성하게 먹고 인터라켄 동쪽 역에서 향했다. 어깨에는 보균 친구가 선물한 푸른색의 등산 가방을 짊어졌다. 마치 유치원 학생들이 소풍가는 것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산악회가 선물한 모자는 보균, 진택, 효범만 썼다.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칼춤으로 유명한 방탄 소년단도 복장이 군대처럼 획일적이지는 않다. 그것이 미(美)고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의 변용을 주어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우리 친구들이 대단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산악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에서 하차하여, 게이블카를 타고 아이거글레처역에서 하차하여,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타고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전망대(3454m)에 도착했다. 이곳은 유럽 최고 고도(Top of Europe)의 기차역이다. 나는 예전에 다른 코스로 올라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늙은 유럽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보다 눈은 많이 녹아 있었지만 알프스의 정수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1시간 넘게 감탄을 연발하며 알프스의 정수리를 감상하고 산악열차를 이용하여 2320m의 아이거글렛처역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감자를 중심으로 한 점심을 먹었다. 감자 옆에는 소세지가 놓여 있었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동기들이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성인 소설 ‘가루지기’의 대물(大物) 같았다. 그곳에서부터 이번에 300산을 등정하는 상구의 진급의식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보균의 ‘삼성 장군 상구’의 건배에 따라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식당에 있는 외국인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며 웃었다. 알프스에 와서 남아의 기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아이거 트래킹(Eiger Trekking)이 시작되었다. 마테호른 북벽, 그랑조라스 북벽과 함께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그 유명한 아이거 북벽 밑을 걷는 것은 스릴 그 자체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환상적이고 두려운 코스였다. 길 주위에는 작은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예전에 백두산을 등반했을 때 천지도 좋았지만 나는 들꽃들에 반했었다. 그런 이름 모를 노랑, 보라, 하양의 조그만 들꽃들이 바람에 날리며 웃고 있는데, 나는 그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해 너무나 속상하고 죄송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안데르 헤크하이머가 초등에 성공한 영광의 아이거 북벽 밑에서 융프(라후) 장군 상구의 진급을 축하는 거창한 세레모니를 가졌다. 자연 속에서 치러진 참으로 멋진 격식은 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나도 산악회에 열심히 참여하여 방위의 한을 풀고 장군이 되고 싶었다. 신인왕 후보인 봉현도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산하여 저녁을 먹을 때 상구는 맥주와 와인으로 진급식의 예를 거창하게 치렀다. 테라스에서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마시는 술은 그냥 물과 같았다.
내일은 정통 알프스 트레킹 코스를 걷는다. 8시간을 걷는 긴 코스이다. 일찍 숙소에 들어가 체력을 비축해야겠지만 나는 오늘 밤을 이대로 자고 싶지는 않다. 내일은 내일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일 뿐이다. 24시간이나 걸린 아주 먼 알프스 인터라켄의 심장부에 와서 누군가와 호수에 빠지지 못한다면, 누가 나보고 시인이라고 부를 것인가. 저녁 식당에서 만난 눈이 뇌쇄적인 아라비아 여인이여. 달이 뜬 이 밤에, 나의 침실로 와다오. 나의 심장은 해처럼 활활 불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