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고유한 가능성
18-4. 고유한 가능성
각자적인 나의 죽음은 무한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각자의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이 종말로 고하는 사건이다. 사람은 보통 죽음을 무한한 과거에서 무한한 미래로 뻗어있는 시간 속의 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 있는 각자의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이 아니다. 자신의 죽음과 자신의 각자적各自的 존재를 망각한 세상 사람에게 나타나는 시간이다.
우리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로의 선구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서 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각자의 고유성을 자각하는 사건이다. “(죽음을 향해) 선구적으로 달려가는 행위에서 이해되어진 죽음의 관계부정성은, 현존재를 그 자신 위에 단독화Vereinzelung시켜 놓는다. 이러한 단독화는 실존을 위하여 마음das Da이 현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 문제가 될 때에, 그 단독화는 일상적인 관심거리와 더불어 사는 모든 존재나 타인들과 더불어 있는 모든 공동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때만,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국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시간이라면, 죽음에로의 선구는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자기 자신만의 일회적인 시간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우리가 세상 사람의 삶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우리가 죽음에로 선구할 경우에는, 죽음은 우리의 삶을 반복될 수 없고 어느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으로서, 즉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으로서 드러낸다.
이렇게 일회적이고 소중한 것으로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하이데거는 ‘시간성Zeitlichkeit’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한한 시간은 무한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정열적인 실존수행을 통해서 형성되는 시간이다. 즉 그러한 시간은 내가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즉 자신의 장래Zukunft에로 나아가는 동시에 탄생하면서 현재에 이르는 과거Gewesenheit로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자신의 장래에로 나아가는 동시에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장차 구현해야 할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인수하면서, 그러한 가능성의 빛 안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재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동안 세간의 가치에 빠져 왔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세인들의 삶 이면에서 면면히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는 훌륭한 삶의 가능성을 유산으로서 계승한다. 면면히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는 훌륭한 삶의 가능성을 유산으로서 계승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예수나 부처와 같은 사람이 보인 삶의 가능성을 자신이 구현해야 할 가능성으로서 인수한다는 것이며, 예수나 부처와 같은 사람을 자신이 본받아야 할 영웅으로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우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자기로부터 등을 돌려서 세상사람 속으로 도피하지만, 그러한 자기가 이미 우리에게 개시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그것을 은폐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능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임의로 고안해낸 가능성이 아니다. 우리가 임으로 고안해내는 가능성은 우리의 삶을 그러한 가능성을 향해서 잡아 이끌면서,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촉구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우리가 실현하도록 이미 주어진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삶을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잡아 이끄는 힘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면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하면서,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몰아대는 것이다.
죽음에로 선구하는 방식으로 장래에로 나아가고 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계승하는 방식으로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현재를 새롭게 경험한다. 그 전에는 우리는 자신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이 추구하는 세상 사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든 것들을 독자적인 고유성과 고귀함을 갖는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본래적 현재를 하이데거는 ‘순간Augenblick’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에 빠져서 지리멸렬하게 분산되어 있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진정한 통일성과 전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삶의 진정한 통일성과 전체성을 경험하게 되면서,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긍정하게 된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관계하는 모든 존재자들과 사건들을 긍정하고 껴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