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03, 어떤 친구)

이효범 2022. 4. 14. 19:33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03, 어떤 친구)

 

o 어떤 친구

 

구녕 이효범

 

어떤 친구가 있었네.

도시 근교에 복사꽃 과수원을 물려받은

복 터진 친구였네.

대학을 마치고 농사가 외롭고 힘들다고

과수원을 팔아 번화한 거리에 전자대리점을 차렸네.

IMF 외환위기로 커다란 전자회사가 파산을 했네.

잘 나가던 전자대리점도 따라서 망했네.

미국 나성으로 이민을 갔네.

주말에 트럭을 몰고 플리마켓에서

흑인에게 옷을 팔았네.

돈을 벌어 세탁소를 인수했네.

돈을 더 벌어 슈퍼마켓으로 갈아탔네.

흑인 폭동으로 다리 한쪽을 잃었네.

모든 재산을 팔고 고향으로 돌아왔네.

도시가 커져 아버지 과수원 땅을

십분의 일밖에 사지 못했네.

고향을 지켰으면 갑부가 되었을 텐데

어렵게 공부해야 무슨 소용이냐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네.

실패한 친구는 아들에게 은밀히 말하네.

연어는 새끼가 어미처럼

태평양 먼 길을 돌면서 고생하라고

죽을 때 고향에 돌아와 알을 낳는다.

아들아 너도 그런 연어가 되어라.

네가 받은 고통만이

너를 하늘에 오르게 한다.

 

후기:

마태복음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길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온다. 누가복음에는 조금 다르게 나오지만 마테복음은 이렇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 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런데 이 비유는 도마복음 107장에는 전혀 다르게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라는 일백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는 목자와도 같다. 백 마리 중에 가장 큰, 그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났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헤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를 끝내었을 때, 목자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보다는 너를 더 사랑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양은 어쩌다 길을 잃은 평범한 양이 아니다. 어떤 의지를 가지고 무리를 떠나는 양이다. 그 양은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일 수 있고, 그리스 인 조르바조르바일 수 있다. 아니면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그 외의 모든 욕망마저도 다 버리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가는 수도자인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은 한 번뿐인 생을 산다. 윤회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몸을 받고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은 일회적이다. 그렇다면 이 번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재산을 많이 가진 것은 의미가 없다. 고통이나 행복도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그리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처럼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진하게 연대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연마하고 한계를 초월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푸틴처럼 자신에 미쳐있지 않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뼈를 깎으며 수행했는지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관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