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3
o 제주도 여행3
구녕 이효범
하루 종일 걸었다. 아침에는 우리가 묵는 소노캄 호텔 주변을 걷고, 점심에는 섭지코지 주위를 걷고, 저녁에는 표선해비치 해변과 제주민속촌을 걷었다. 멀리 한라산 정상에는 흰 눈이 남아 있고 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었다. 아내가 무릎이 안 좋기 때문에 걷다가 쉬고 쉬다가 걸었다. 눈길을 바다로 향하면 망망대해와 푸른 하늘이 화면을 반으로 가르고 있다. 그 사이에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만 가지 모양의 파도를 만들고 있다. 우주 존재의 시작도 이러했을까? 걷다 보니 일만 사천 보를 걸었다. 제주올레 길은 총 26코스에 425km다. 그 중 아주 일부를 자동차를 보조수단으로 해서 띄엄띄엄 걸은 셈이다.
나는 퇴직한 후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걷고 싶었다. 이 길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의 도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가는 길이다. 여러 코스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피데포르에서 시작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 800km의 길이 가장 유명하다.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길을 걸으면서 오늘 걷는 길과 앞으로 걸을 그 길을 상상해보았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 걷는 제주의 길은 노자가 묘사하는 도처럼 끝없이 진행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듯이 순환적이다. 이런 순환의 길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스페인 순례의 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적 역사관처럼 일회적이며, 직선적이며, 종말론적이며, 목적론적이며, 구속사적이며, 섭리론적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길은 죄와 구원, 선과 악, 천당과 지옥, 죽음과 삶처럼 우리를 긴장시킨다. 인생을 시작하는 나이가 아니라 늦은 말년에 그런 긴장 속으로 나를 몰아넣을 필요가 있을까? 천주교 신자였던 삼성의 창시자 이병철 회장은 인생 말년에 50개의 질문을 신부님께 보냈다. 철학자인 나도 혼자 오래 걸으면서 그런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책에서 읽은 남의 이론이 아니라, 나의 체험과 이야기로 풀어보고 싶다. 걸을 때는 시가 종종 찾아온다. 잡다하게 꼬였던 문제들도 쉽게 정리된다.
오늘 아내와 걸은 길은 너무나 편안했다. 하나의 코스를 완료해야지 하는 어떤 목적이 없어서 더욱 좋았다. 적당히 지치면 돌아가면 그만이다. 등산을 하면 산의 중간에서 멈추는 일은 커다란 고통이다. 그러니 부부가 나이 들어서는 명랑한 산보가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오늘 우리 부부 걷기의 백미는 섭지코지의 ‘민트(Mint)레스토랑’이다. 강원도 원주의 ‘뮤지엄 산(Museum SAN)’을 설계한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물 2층에 들어있다. 이 식당은 신혼부부가 올 정도로 꽤 격식 있는 식당이었다. 한쪽에 앉아 식사하는 신혼부부의 이마에는 ‘신혼부부’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는 듯 했다. 우리도 40년 전에는 저렇게 상큼했을까? 아마 피부도 꺼칠하고 훨씬 촌스러웠을 것이다.
메뉴판이 주어졌지만 점심 메뉴는 딱 한 종류의 코스요리뿐이었다. 소련 항공기 기내식처럼 먹을래 말래. 가격에 놀라 아내는 일어서려고 했다. “오늘은 나도 모처럼 카드를 가지고 왔어요.” 돈은 누가 내든 나는 웃으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푸른 바다 건너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이색적인 풍경은 우리를 압도했다. 또 요리 하나하나도 예술이었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쉬운 듯 마지막 내온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마셨다. 하마터면 그릇까지 먹을 뻔했다. 아내에게 이런 식사대접을 한 지가 언제였던가.
식사 후에 만족한 모습으로 아내는 “당신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나요?” 갑자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신은 존재하지.”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렇게 기도하는데 왜 교회에 나가지 않나요?”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을 다르게 생각하지.” 나는 철학적으로 대답했다. “신은 유일하다고 하던데요.”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신은 누군데?” 어디서 보았는지 아내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상상 속의 인물이죠.”라고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혔다. 오래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스페인의 순례자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봐야 이 문제가 풀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