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26, 길)
o 길
구녕 이효범
오래 산길을 걸은 사람은
산 냄새가 난다
산에서 피는 풀꽃 향기가 난다.
오래 강가를 걸은 사람은
강 소리가 난다
강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난다.
큰 산을 넘어
긴 강을 건너 오래 걸은 사람은
노을 빛깔이 난다
노을에서 익은 열매 빛깔이 난다.
후기: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사람이 태어날 때 이성과 같은 본질이 먼저 주어진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先行한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처럼, 무슨 이유인지 인간은 이 세상에 먼저 던져졌고(실존) 그리고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정체(본질)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B.F. Skinner)도 인간은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자아나 자기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조건화(conditioning)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곡마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여 원하는 행동을 얻을 수 있듯이, 인간은 말하자면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음악가가 되기를 원하면 음악가가 될 수 있고, 사업가를 원하면 사업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들이여 어쨌든 우리가 태어나서 오랫동안 걸어온 길은 우리의 본질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운명처럼 그 길이 주어졌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 길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길을 가면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었는지 아니면 불가능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걸어 온 나의 스토리는 나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었고, 내가 그 길을 걸으면서 내적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과 화해,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가졌는지 자세하게 헤아리지 않고, 세상은 그 길 자체로 나를 평가해 버립니다.
이제 하루해가 지나가고 노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도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길도 평탄한 길일지 가시밭길일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먼 길에서 나름대로 고난을 극복한 지혜를 가지고 대처한다면 말년이 그리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는 나에게 귀중한 지혜를 주었습니다. “오로지 그대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남의 것으로 돌리십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그대를 제지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 또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그대의 의지에 거슬러서 무엇인가를 억지로 해야 하는 일도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누구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으므로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적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