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9, 봄비)

이효범 2020. 3. 3. 08:49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9, 봄비)

 

o 봄비

 

구녕 이효범

 

밤새 돈 다 날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름꾼 얼굴보다 더 푸시시한 황토 밭뙈기.

돌무더기 개천에서 어설피 깨어나

멀거니 두리번거리는 버들강아지.

버들강아지 뿌리에서 꼼지락거리는 가재새끼.

검은 구름 걸치는 외딴 산 중턱에

아이 없는 농사꾼 부부.

복권이 당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봄비.

하늘, 하늘 내려와 마른 눈물 닦아주는 봄비.

남쪽으로 가고 싶어도, 북쪽으로 가고 싶어도

여기가 고향인 냥 수줍게 내리는 연두빛 봄비.

춘분 지나 한식쯤

지난 세월 말할 듯, 말할 듯

차마 말 한 마디 못하고

어머니 둥근 무덤만 적시는 봄비.

 

o 후기:

봄이 오니 약속이라도 한 듯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전하느라 카톡 음악방에는 봄노래가 넘쳐 납니다.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데.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긔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어느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데나.”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부친 이 노래를 여러 가수들이 불렀지만, 박강수의 노래는 우리를 들뜨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 봄은 찬란한 계절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봄날에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참으로 갑갑합니다. 봄에 대해 시를 쓰고 싶은데, 감동적인 시들은 이미 모두 다른 시인들이 발표했지, 무엇 하나 한 가지 잡혀지는 것이 없습니다. 봄의 서정에 대한 시는 넘치고 넘쳐 봄과 현대 문명, 봄과 신화, 봄과 환경문제, 봄과 한국 전통, 봄과 종교, 봄과 전쟁 --- 이런 것들을 잡다하게 끝없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나는 안타깝게도 한 줄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깊은 경험이 全無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초라한 농부입니다.

그래, 세상에 나가 밑바닥부터 짙게 그리고 깊게 경험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시로 형상해보자. 그러나 언제 그러지요. 내 나이 이미 70을 바라보는데. 그래서 나는 바위처럼 절망합니다. 이번 봄에도 나는 또 한 번 전신을 뒤집어 놓는 홍역을 치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