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 2021. 11. 9. 07:27

3-2-5. 좌망

 

이상적 인간이 되기 위해 장자가 중요시 한 수행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성수반덕性脩反德이다. 장자에 따르면 천지 만물의 근원은 이고 사람의 근원은 이다. 덕은 어떤 개체에 전개되어 내재한 도이기 때문에 본성에 있어서 도와 동일하다. 그런데 사람의 성품은 물질세계 속에서 육신과 물질의 영향을 받아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구정물에 물들어 있다. 그러한 성품을 밝혀 본연의 성품을 되찾는 것이 성수반덕이다.

인간의 심성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남김없이 제거한다면 덕성의 순수한 빛만이 남게 된다. 그 빛은 일절의 근원根源을 비출 수 있다. 이것을 장자는 조철 견독朝徹見獨이라고 하였다. ‘조철은 수도하는 사람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환히 뚫리는 것이며, ‘견독은 독자적 실체인 도를 보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정虛靜한 심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아의 본성인 덕과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인간은 도와 통하게 된다.

장자는 자기의 내면에서 찾지(내구內求) 않고 바깥 세계에서 찾으면(외구外求)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는(위도爲道) 심재心齋, 전심일지專心一志, 좌망坐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심재는 제사를 앞둔 사람이 며칠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육신의 재계齋戒를 하듯 마음의 재계를 뜻한다. 이런 심재를 통해 마음속에서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물든 성향을 씻어버리면 마음이 텅 비게 되고, 마음이 텅 비게 되면 허령虛靈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나와 대상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고 나와 물을 모두 잊어버리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목세공인木細工人인 경이 나무를 깎아 북틀을 만들었다. 이윽고 북틀이 완성되자 보는 이마다 놀라서 신기神技와 같다고 하였다. 나라 임금이 보고서 물었다. “그대는 무슨 기술로 만들었는가?” 경이 대답하였다. “저는 그저 목수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기술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꼭 한 가지 기술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북틀을 만들 때 일찍이 신기神氣를 소모한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평정하게 가라앉혔습니다. 사흘을 재계하니 감히 칭찬 속에 상 받는 것과 벼슬하여 봉록俸祿을 얻으려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닷새를 재계하니 비난과 찬양이며 정교함과 졸렬함을 의식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레를 재계하니 문득 제게 팔과 다리와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때가 되면 제가 조정에 있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기교技巧에 집중되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제 마음에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런 뒤 숲에 들어가며, 나무들 가운데에 그 천성天性인 모습이 북틀()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좋은 북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나무를 잘라 세공을 합니다. 그런 나무가 없으면 만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저는 하늘이 준 기의 작용과 나무의 천성인 형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以天合天). 북틀이 신기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합니다.”

 

전심일지專心一志는 심지心志를 전일하게 하는 수양 공부로서 분산된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는 방법이다. 사람은 현상계 속에 살면서 사려 분별하는 가운데 의식이 분산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의식으로는 도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을 장자는 매미 잡는 노인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에 숲을 지나다가 등이 구부러진 노인이 댓가지로 매미를 잡는데 마치 손으로 물건 집듯이 손쉽게 잡는 모습을 보았다. 공자가 그 노인에게 당신은 정말 훌륭한 재주를 가지셨군요! 매미를 잡는 데도 비결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다네. 5, 6개월쯤 훈련하여, 장대 끝에 구슬을 두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 장대로 매미를 잡더라도 놓치는 일이 드물지. 장대 끝에 구슬을 세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어떻게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 장대로 매미를 잡더라도 실수할 경우는 열 번에 한 번밖에 되지 않네. 장대 끝에 구슬을 다섯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매미를 잡는 것이 마치 물건을 줍는 것처럼 쉽게 된다네. 마치 그루터기처럼 몸을 오므린 채 꼼짝 않고,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조용히, 장대를 들고 있는 팔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네. 천지의 광대廣大함도, 만물의 다양함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매미의 날개만이 눈에 들어온다네. 나는, 뒤를 돌아다보거나 곁눈질 따위를 하지 않고, 이 세상 어떠한 사물에 의해서도 매미 날개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는다네. 이러하니, 어찌 매미를 놓치는 일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그 기가 거의 신기神技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저 영감님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인용에서는 공자가 거론되었지만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수의 공부이다.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전일 공부가 심지를 쓰되 나누지 않는 용지불분用志不分의 경지를 닦기 위한 것이라면, 외물의 자극에 의하여 동요하지 않게 본성을 함양하는 방법이 수의 공부이다. 이것을 장자는 하나를 지킴(守其一)’, ‘근본을 지킴(守其本)’, ‘오직 신을 지킴(唯神是守)’, ‘그 으뜸을 지킴(守其宗)’, 삼가 진을 지킴(愼守其眞)’, ‘순수한 기를 지킴(純氣之守)’ 등의 말로 표현하였다.

좌망坐忘은 정좌한 상태에서 자아, 사회, 자연 등 일체의 현상을 잊어버리는 정신의 경지이다.

 

안회가 스승인 공자에게 말했다. “요즘 약간의 진척을 보았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인의仁義의 행위에 힘쓰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이를 평하여 말했다. “됐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후 어느 날,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그후 저는 약간의 진척을 보였습니다.” 이 말에 공자가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이냐?”라고 묻자, 안회는 세속의 관습을 좇아 예를 지켜 사람과 사귀거나, 음악을 즐기며 사람과 화합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를 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시 그후 어느 날, 안회는 또 공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전에 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좌망坐忘에 들게 되었습니다라고 안회가 대답했다. 공자는 안회의 말에 깜짝 놀라, 태도를 바르게 하고 물었다. “좌망? 그것이 무엇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살아 있는 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총명한 이목耳目의 활동을 없애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몸으로부터 떠나고 존재의 징후인 지혜로부터 떠나, 오직 자연의 큰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감탄하여 말했다. “큰 도와 하나가 되었다면, 굳이 그것을 좋다 나쁘다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자연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이제 너를 이야기함에, 이 세상의 언어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말 따위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부터 나는 너의 뒤를 따르며 네게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

 

장자는 인의예악仁義禮樂과 같은 도덕 관념도 자기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 것들을 잊는 것은 망외忘外 혹은 망물忘物이다. 더 나아가 도덕 관념을 발생케 하는 주체인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망내忘內 혹은 망기忘己이다. 여기서 안회가 말하는 망기는 인간의 형체인 육신을 잊는 것이고, 총명이라는 마음을 잊는 것이다. 나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도와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좌망이다.

좌망의 경지에 도달할 때 마음은 아무 장애 없이 활짝 열려져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게 된다. 육체적인 자아, 지략에 묶여 있는 자아로부터 끌어올려지며, 개체적인 소아小我부터 드넓은 외계 속에서 우주적 대아大我를 실현한다. 장자가 말하는 대통大通의 경지에 도달하여 대도大道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만물과 화해롭게 통하여 편애가 없어지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참여하여 편견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대통의 경지이다.

장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에 속박당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제어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을 물되게 하되, 물에 의하여 물되지 않는다(物物而不物於物)”는 인생관을 제시하였다.

 

(저 무위자연의 도덕에 의거하여 자유를 누리게 되면, 번뇌는 없다.) ……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늘 융화融和를 근본으로 삼고, 만물을 만들어 내는 조물자造物者가 있는 곳에 갑자기 가 그를 도와, 만물을 각각의 물로서 자라게 하고, 자신을 다른 물로부터 하나의 물로서 부림받는 일이 없다. 이러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찌 괴롭힐 수 있겠는가.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은 일체 사물과 사건을 주재하되 그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음을 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지 만물을 존재하고 움직이게 하는 도와 하나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떤 사물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 자재할 수 있다. 이것이 장자가 주장하는 소요유逍遙遊이다.

더 읽을거리

 

윤천근 외, ?노장철학의 현대적 조명?, 외계출판사, 1989.

許坑生, 노승현 역, ?노자철학과 도교?, 예문서원, 1995.

陳鼓應, 최진석 역, ?老莊新論?, 소나무, 1997.

김용옥, ?노자와 21세기?(1, 2, 3), 통나무, 2000.

김병찬, ?철학적 인간상의 모색?, 전남대출판부, 1992.

김항배, ?장자철학정해?, 불광출판부, 1992.

김형효,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청계, 1999.

이강수, ?도가사상의 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84.

▪―――, ?노자와 장자?, , 1998.

장진, ?장자적 지혜?, 조선, 1992.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한국동양철학회, ?기술정보화 시대의 인간문제?, 현암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