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다.
3-1-2.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다.
중국 철학사를 볼 때 노자와 장자에 의해서 도 개념은 기존의 천天, 제帝 개념과는 달리, 완전히 비인격화된 궁극적 실재의 개념으로 바뀐다. 즉 도 개념은 그 사용 범위가 천과 제 개념보다 더욱 확대되는데, 그 까닭은 도가 세계의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는 그 이전의 천과 제의 개념을 계승하는 국면도 지닌다. 왜냐하면 도교가 도와 인간과의 상호 관련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도가 인간에게 불가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도교의 도는 결코 인간에게 어떤 특수한 은혜를 베풀거나, 인간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는 어떤 특정한 사물에 치우침이 없이 만물을 생산, 포용, 변화, 보존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러한 도의 공평성에 의거하여 모든 사물을 바라보면 만물은 본체론적으로 모두 평등하게 된다. 실제로 노자가 말한 도의 근본 개념 가운데는 이러한 의미의 본체론적인 평등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도를 기초로 하여 장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 세계의 모든 사물이 본체론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무엇보다도 전체성을 지닌다. 따라서 도는 본질적으로 어떤 한계를 그을 수도 없고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다. 즉 도는 어떤 대상으로 한정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특성을 한정지어 표현할 수도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름이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도가 어떤 유사한 특성에 의해서 서술될 수 없다는 말은 도가 어떤 유한한 특성을 지닌 사물과 다름을 의미한다. 즉 유한한 특성을 지닌 사물을 유有라고 한다면, 도는 이러한 유와는 정반대가 되므로 노자는 도를 무無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를 소극적으로 인정되는 실재가 아닌, 제한을 받지 않는 모든 사물의 원천 혹은 근거라는 적극적 존재로 파악한다.
이런 도의 다른 특징은 도가 공空, 무無이면서 동시에 일체 사물을 만든다는 점이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천하의 만물은 유有에서 생기고, 유는 무無에서 생긴다.
도는 공허한 것이지만 작용은 무궁하다. 깊기도 하구나! 마치 만물의 으뜸과 같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이런 의미에서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근거)이다. 도는 자연계의 원동자原動者이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물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도 모두 도의 표현에 불과하다.
도가 만물에 작용할 때 어떤 법칙성이 드러난다. 노자는 그것이 우리 인간의 행위 준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노자?에는 법칙을 나타내는 ‘도’가 많이 언급되고 있다.
서양의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세계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로 되어 있다고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한다. 유가의 철학도 이런 본질주의적 특징이 나타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정명正名사상에서 우리는 이런 특징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노자는 세계가 대립쌍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원칙(항恒)이자 법칙(상常)이라는 것이다. 이런 존재 형식 내지 원칙에 노자는 ‘도’라는 기호를 붙인다.
도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형성되고 변화하고 운동하는 법칙을 말한다. 그 법칙의 총괄적인 모습은 ‘반대 방향으로(反)’ 향한다는 점이다. 노자는 모든 사물들이 상반된 방향으로 운동 발전하고, 동시에 사물의 운동 발전은 결국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반反’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기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도는 ‘상반대립相反對立’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최초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반회返回’의 의미이다.
노자는 모든 현상이 상반 대립되는 상태에서 형성된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나타내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기울이고,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모든 사물에는 대립면이 있고, 동시에 그 대립면을 근거로 존재하게 된다. 또한 노자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을 사물의 변화 발전을 촉진하는 힘으로, 더 나아가 상반 대립하는 상태가 항상 서로 전화轉化한다고 이해한다.
화에는 복이 그 속에 숨어 있다. 복에는 화가 그 안에 잠복해 있다.
노자는 모든 사물이 대립 속에서 계속 변하고 전화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사물의 상반 대립하는 상태와 대립면의 전화를 중요하게 지적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자는 사물이 대립 관계 안에서 생성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사물을 관찰할 때는 그것의 정면뿐 아니라 그것의 반대면도 주시해야 하며, 두 방면을 모두 살핀 후에야 비로소 어떤 사물을 전반적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노자는 사물의 정면만을 고집하는 유가儒家의 철학을 부정한다. 그는 반대면에서 정면의 깊은 의미를 파악해야 비로소 어떤 사물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면과의 관계에서 정면을 바라볼 때만이 정면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대립면의 작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노자는 사물의 부정적인 면을 고수하는 것이 정면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웅雌雄, 선후先後, 고하高下, 유무有無, 미추美醜, 장단長短, 난이難易, 진위眞僞, 음양陰陽, 선불선善不善 등의 대립 상태에서 보통 사람들은 웅雄, 선先, 고高, 유有, 미美, 장長, 이易, 진眞, 양陽, 선善에 집착하지만 노자는 자雌, 후後, 하下, 무無 등을 더 강조한다. 그는 여성스런 모습을 가지는 것이 씩씩한 수컷의 모습보다 낫고, 뒤서는 것이 앞서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또한 낮은 것이 높은 것의 기초인데,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높은 것은 바로 붕괴될 것이라며 낮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셋째, 노자는 사물이 끝까지 발전하면 원래 있는 상황을 바꿔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변화한다고 인식한다. 이것이 소위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간다(물극필반物極必反)’는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이 도의 법칙이다. 도가 사물에 작용할 때 사물도 이 변화의 법칙에 따라 운동하게 된다.
노자는 상반 대립하는 사물의 관계와 대립면을 향해 전화하는 사물의 작용을 중시한다. 그러나 노자 철학의 귀결점은 근본이 되는 최초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만물은 도로부터 나와서 다시 도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反’의 두 번째 의미인 ‘반회返回’이다. 이것은 도의 순환 운동을 말한다.
혼돈스럽게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 순환 운행하고 쉬지 않고 태어난다. (---) 그것은 한없이 커서 쉼 없이 운행하고, 쉼 없이 운행하여 멀리 펼쳐지고, 멀리 펼쳐진 후에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온다.
마음을 공허하게 하고 청정한 상태를 지켜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 만물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것에서 나는 왕복 순환하는 이치를 본다. 만물이 저렇게 다양하지만 각자 그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靜)이라 하고, 이는 생명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생명으로 복귀하는 것을 늘 그러함(常)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경거망동하여 흉凶을 짓는다.
만물은 도에서 분리되어 나온 후에 널리 운동하여 퍼져 나가고 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도에서 요원해지면 극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고 또 원점으로 회복된다. 이렇게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주행周行이다. 주周는 둥근 원을 가리키며 순환의 의미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란 “주행하면서 위태하지 않다(주행이불태周行而不殆)”라고 묘사한다.
그러면 노자가 생각하는 근본은 어떤 상태일까? 그것은 일종의 비어있고 고요한 허정虛靜한 상태이다. 그가 보기에 도는 자연에 부합하는 것이고, 허정은 자연의 상태이다. 그러나 도가 만물을 창조한 이후에 만물의 운동 발전은 점점 도를 떠나 도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더욱 자연에 부합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란이나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근본으로 되돌아오고 허정을 지켜야만 자연에 부합하여 소란이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노자는 사물이 대립하여 변화하고 순환하는 우주론적 원리인 도를 인간사에 적용한다. 인간의 세계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도의 근본 상태가 허정이라면 인간도 허정 상태를 지켜야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잘 보존하여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만약 스스로의 힘을 다 소모하게 되면, 그는 도의 산물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소용이 없어져, 자연에서 버림받게 된다. 지나친 노력이 오히려 좌절과 쇠망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노자는 역설적으로 불영不盈과 무위無爲가 삶의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