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호연지기
2-4-3. 호연지기
대인이 되는 방법은 반성적 사고를 가지고 도를 밝히는 것과 인간이 본래 타고난 양지良知, 양능良能을 존양存養하는 두 가지다. 맹자는 인간의 심리적 기능을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반성적 사고를 ‘사思’라고 했다. 그리하여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의 기관은 생각을 한다. 생각하면 도리를 얻고 생각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바이다. 그러므로 먼저 큰 것을 세워 놓으면 작은 것에 빠지지 않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대인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반성적 사고로 말미암아 인간은 사태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고 외적 환경에 의해 지배되는 피동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맹자는 그렇지 않으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귀나 눈의 구실이란 생각하는 힘이 없으므로 물욕으로 인해서 가리워지는 것이니 물욕과 외물이 얽히면 이목이 끌려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반성적 사고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해야 한다. 타인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사랑이 철저하지 않은가를 반성하라. 남을 다스렸는데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혜가 모자라지 않은가를 반성하라. 남을 예로써 대하는데도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가 성실하지 않은가를 반성하라. 행하고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라. 이런 반성적 사고를 통해서 대인은 자기를 바로잡고 모든 사물을 바로잡는다.
맹자는 대인이 되는 다른 한 방법으로 존양存養을 말한다. 존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본심인 인의예지를 보존한다는 뜻이다. 맹자와 점 墊이라는 왕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왕자 점墊이 묻되, 선비는 어떤 일을 합니까? 맹자는 답하되, “뜻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또 묻되, 뜻을 높인다 함은 무엇을 이릅니까? 답하되, “인과 의를 행하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이 아니며 제것이 아닌 것을 가지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몸둘 곳은 어디에 있겠나요? 인이 그것입니다. 갈 길은 어디에 있겠나요? 의가 그것입니다. 인에 살면서 의를 행하면 대인의 일이 갖추어집니다.”
그리고 존양에서 말하는 양이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본심을 잘 기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양養함을 얻게 되면 자라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그의 양함을 잃으면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본성을 존양하는 방식에 대해 맹자는 그의 유명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서 잘 논하고 있다.
한 제자가 맹자에게 그의 장점을 물었다. 맹자는 “나는 남의 말을 알고(지언知言),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답변했다. 제자는 또 호연지기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맹자는 “말하기 어렵다. 그 기란 아주 크고 굳세어서 아무 탈없이 곧바로 길러 내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기는 의義와 도道와 함께 있어 도우니 이것이 없으면 실현하기에 부족하게 된다. 이것은 의를 거듭 쌓아서 생기게 된 것이다. 의가 갑자기 엄습해 와서 이를 얻은 것이 아니다. 행하는 것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음이 있으면 쭈그러든다. 나는 그래서 고자告子는 일찍이 의를 몰랐다고 말한 것이니 그것은 그가 의를 외재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언知言이란, 편벽된 말(피사詖辭)을 들으면 그 막힌 바를 알고, 음란한 말(음사淫辭)을 들으면 그 사람이 빠져 있는 바를 알며, 간사한 말(사사邪辭)을 들으면 그 사람이 이간하는 것을 알며, 꾸며 대는 말(둔사遁辭)을 들으면 그 사람이 궁한 것을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맹자가 쓰고 있는 호연지기란 그의 독특한 용어다. 후에 맹자의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호연지기’란 말이 종종 쓰이기도 하였으나, 고대에서 이 용어는 「공손추公孫丑」 장에서만 나온다. 그러므로 호연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맹자 자신도 “말하기 어렵다”고 시인하고 있다. 이런 호연지기에 대한 김형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천지의 기를 받아 태어났으며, 인간의 본디 기는 천지의 기만큼 크고 굳센 것이다. 그 기를 올바르게 기르면 사람의 기는 천지의 기와 동참하게 된다. 그런 기가 곧 호연지기다. 그 기는 도道와 의義와 짝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정신적 허탈을 맛보게 된다. 호연지기는 그래서 의義에 합당하다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도가 된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도에 대한 자각, 즉 명도明道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의 백성으로 우주에서 인간이 자기의 맡은 바 의무를 끊임없이 수행하여 나가는 집의集義이다. 이 두 가지 배합을 배의여도配義與道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수양 공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만일 집의만 알고 도를 알지 못하면 뚜렷하지 않고 자세하지 않다. 그리고 만약 명도만 하고 집의하지 못하면 비록 얻으나 반드시 잃을 것이다.
인간이 도를 깨닫고 오랫동안 의를 쌓으면 호연지기가 저절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호연지기는 밖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맹자는 이 점을 비유로써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송인宋人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한 송인이 자기가 심은 곡식 싹이 자라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싹을 뽑아 버렸다. 그리고 바쁘게 집에 돌아와 자기 식구에게 “오늘은 지쳤네. 나는 싹이 자라도록 손질하고 왔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싹은 이미 말라죽어 있었다. 이 세상에는 싹을 자라게 도와주지 않는 이는 드물다. 무익하다고 여기어 버려두는 이는 논에 김을 매주지 않는 사람이고, 자라게 하려고 무리하게 도와주는 이는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다. 그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해치는 것이다.
우리가 식물을 재배할 때 한편으로는 정성스럽게 잘 가꾸어 주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코 조장해서는 안 되듯이,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호연지기를 기르는 사람은 한시도 그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른바 “반드시 여기에 일삼음이 있으되 그치지 말고 마음으로 잊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호연지기가 충만하면 사람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 호연지기는 좀 신비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맹자는 모든 사람이 다 호연지기를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충분히 계발시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맹자는 자기의 본성을 충분히 계발시키기만 하면 누구나 인간은 요, 순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더 읽을거리
▪곽신환, ?주역의 이해?, 서광사, 1990.
▪곽신환, ?주역의 지혜?, 서광사, 2017.
▪이기동, ?주역강설?, 성균관대출판부, 2010.
▪금장태, ?유학사상의 이해?, 집문당, 1996.
▪한국동양철학회 편,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 연세대출판부, 1982.
▪陳立夫, 정인재 역, ?중국철학의 인간학적 이해?, 민지사, 1988.
▪馮友蘭,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상, 하?, 까치, 1999.
▪김태길, ?공자사상과 현대사회?, 철학과 현실사, 1998.
▪김형효, ?맹자와 순자의 철학사상?, 삼지원, 1990.
▪중국철학연구회, ?동양의 인간이해?, 형설출판사, 1992.
▪蒙培元, 이상선 역, ?중국심성론?, 법인문화사, 1996.
▪H. G. 크릴, 이동준 역, ?중국사상의 이해?, 경문사, 1981.
▪최상진 외, ?동양심리학?, 지식산업사, 1999.
▪Donald J. Munro,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