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15, 선결문제, 복합질문의, 흑백사고의 오류)

이효범 2021. 9. 23. 13:41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15, 선결문제, 복합질문의, 흑백사고의 오류)

 

구녕 이효범

 

6. 가정의 오류(fallacies of presumption)

 

논변을 제시하는 목적은 결론을 더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론보다 더 확실하고 납득할만한 근거를 가진 전제를 사용해야 한다. 사용된 전제가 결론에 의존하거나 의심스러울 경우 가정의 오류가 발생한다.

 

6-1.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fallacy of petitio principi, begging the question)

 

만약 어떤 논증이 그것이 증명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는 것을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논증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이 철수는 미쳤어.’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정말이야? 확실해?’라고 물었을 때, 그가 확실해.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 철수는 정신병자야. 그러므로 그는 미쳤어.’라고 대답한다고 상정해보자. 이것은 전체가 참이면 그 결론 또한 반드시 참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하나의 타당한 논증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사실상 아무 것도 증명하고 있지 않으므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것을 형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p는 참이다(때로 p에 다른 언명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p는 참이다.

 

이 논증에서 전제는 단순히 결론을 다른 말로 바꾼 문장일 뿐이므로 결론의 참됨을 실제로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제의 참됨에 대해서도 똑같은 만큼 의심하여야 하며, 그래서 이 논증은 결론의 참됨을 납득시키려는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렇게 이 논증은 그것이 증명하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는 바로 그것을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음에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에 구걸하는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형식도 있다.

 

p는 참이다. 왜냐하면 q가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q는 참이다. 왜냐하면 r이 참이기 때문이다. 또한 r은 참이다. 왜냐하면 p가 참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논증을 순환논증(circular argument)이라고 한다. 순환논증도 결론 PP에 대한 이유 사이에 많은 단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P는 참인데, P이기 때문이다라는 형식을 띄고 있다. 그 예를 하나 살펴보자.

 

코란에 나와 있는 모든 언명은 참이다. 그것은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란이 신의 말씀임을 알고 있는데, 마호메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마호메트가 말한 것을 신뢰할 수 있는데, 그는 신의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분명 신의 예언자임을 알고 있다. 코란에서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고,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참이기 때문이다.”

 

6-2. 복합질문의 오류(fallacy of complex question)

 

겉으로 보기에 하나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복합되어 있을 때 복합질문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질문은 어떻게 대답하든 대답하는 사람이 수긍할 수 없거나 수긍하고 싶지 않은 점을 수긍하는 결과를 야기시킨다. 이런 질문은 질문이 물어지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쟁점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쟁점이 없거나, 쟁점이 이미 해결된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복합질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은 애매한 질문이거나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져 있다. 이러한 복합질문이 물어졌을 경우에는 당연히 질문을 단순질문으로 나누어 답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학생에게 학생 이제 담배 끊었어?’하고 질문하는 경우, 이 학생이 하고 답한다면, ‘예전에 많이 피웠다는거군.’하고 혼날 수 있다. 아니오하고 답한다면 아직 계속 피고 있다는 말이군.’하고 혼날 수 있다. 이런 경우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학생은, ‘혹은 아니오로 답할 것이 아니라, ‘저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을 필요도 없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선생님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 질문의 의도에 바보처럼 넘어가서는 안 된다.

 

6-3. 흑백사고의 오류(black-and-white fallacy)

 

어떤 종류의 원소가 단 두 개밖에 없다고 여기고 추리하는 오류이다. 어떤 대상의 색깔이 하얗지 않다는 전제에서 그 대상이 검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 대상이 가질 수 있는 색이 흰색과 검정색의 단 둘뿐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두 가지 색 이외에 다른 많은 색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다고요? 그럼 당신은 무신론자군요.’ 유신론자가 아니라고 해서 무신론자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 오류는 선언지 제거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논증의 형식 자체는 타당하지만 선언지가 둘에 그치지 않은 경우를 둘에 그친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류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