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2, 단어의 애매성)

이효범 2021. 9. 7. 06:31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2. 단어의 애매성)

 

2. 언어적 오류(fallacia in dictioe)

 

구녕 이효범

 

언어적 오류는 언어의 불완전한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이다. 데카르트는 진리는 확실한 것(certainty)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자명(自明, evidence)한 것이고, 자명한 것은 명석판명(明晳判明, clear and distinct))한 것이다. 명석은 하나의 개념이 하나의 뜻을 갖는 것이며, 판명은 하나의 개념이 지칭하는 외연이 다른 것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명석판명과 대비되는 개념이 애매모호(曖昧模糊. ambiguous and vague)’라는 개념이다. 애매는 하나의 개념이 다의적인 것이고, 모호는 가리키는 외연이 불분명할 것이다. 전자는 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은 우리가 의사소통할 때 나누는 수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올라타고 가는 동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는 대머리라는 개념이 그렇다. 대머리의 뜻은 하나이지만, ‘대머리라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단어 혹은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경우, 한 문맥에서 사용된 의미와 다른 문맥에서 사용된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이를 간과하면 애매어의 오류(fallacy of ambiguity)를 범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애매성에도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이 있다.

 

2-1. 단어의 애매성(ambiguity of equivocation)이다. 어떤 중요한 단어가 들어간 문장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또는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그 단어는 애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평등한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대답이 다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의 권리는 평등하다고 생각해서 라고 대답하고, 다른 사람은 타고난 재능의 불평등 때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평등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애매하다.

 

밀은 ?공리주의?에서 행복(, )은 욕구되는 것이다라는 정의(定義)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어떤 대상이 볼 수 있는(visible)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은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을 수 있는(audible)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은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듣는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것이 바람직한(desirable)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애매한 단어는 바람직한이다. 밀의 공리주의를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현대 분석윤리학자 무어(G.E.Moore)는 이 단락에서 바람직한볼 수 있는들을 수 있는에 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의 의미는 그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을 뜻하는 바람직한이어서는 안 되고, ‘바랄 수 있는'(can be desired)의 의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밀은 바랄 수 있는'을 생각하지 않고, 애매하게 바랄만한'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무어는 밀이 바람직한' 것이 행복()'이고 그것이 곧 욕구되는 것'이라고 정의하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서양 철학사에서 에피쿠로스(Epicurus)의 죽음에 대한 논증은 유명하다. 그의 주장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내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내게 올 수 없고, 죽음이 이미 내게 왔을 때는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공포라는 개념이 애매하다. 공포는 호랑이 같은 일정한 대상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다. 깊은 산 속에서 총도 없이 호랑이를 만났다면 우리는 공포에 떨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호랑이가 덤비지 않고 사라지면 공포가 사라진다. 죽음이 호랑이 같다면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논변에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공포에는 결과에 대한 느낌인 두려움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죽음 후의 상황에 대해 얼마든지 두려움에 떨 수 있다. 이런 공포라면 에피쿠로스의 논변으로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논리학에서는 이다를 술어로 사용할 때와 존재의 동일성으로 사용할 때를 엄격하게 구분하라고 조언하다. ‘신은 사랑이다에서의 이다는 술어로 사용된 예이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은 흔한 것이 아니다에서의 이다의 부정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재의 의미이다. 두 예에서 이다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취급하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신은 진실한 사랑이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은 흔하지 않다. 따라서 신은 흔하지 않다.” 이런 문제가 서양 중세에 신을 증명하는 문제에서 발생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론적 증명으로 유명하다. 그의 증명의 대략은 이렇다. “하느님은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그 본성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을 더 단순하게 도식화한다면,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다.(전제) 가장 위대한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사실) 따라서 하느님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결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전제의 이다와 결론의 이다는 다른 의미이다. 전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위대라는 속성에서, 과연 결론에서 말하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까? 논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