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3)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3)
o 선에 대하여(13)
구녕 이효범
헤어(R.M,Hare, 1919~2002)는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상언어학파(ordinary language school)의 윤리학자로, 『도덕의 언어(Language of Morals)』가 대표작이다. 일상언어학파는 후기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의 언어이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 비트겐스타인은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러셀과 함께 기호논리에 기초한 이상언어(理想言語, ideal language)를 인공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후기에 와서는 언어가 세상을 기술하는 것 이외에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언어의 의미는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어떻게 사용(use)하는지에 달려있다고 함으로써, 일상 언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일상 언어학파는 초기 비트켄슈타인과 연결된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와 공통점도 갖고 있고 차이점도 갖고 있다. 공통점은, 실재의 궁극적 성질을 탐구함이 철학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과, 경험론적 지반 위에서 과학을 존중하고 형이상학을 회피한다는 것과, 언어 분석을 통하여 사상의 뜻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일상 언어학파는 감각적 소재나 일상적 언어 등 상식적인 것을 더 존중한다는 것과, 전문적 과학 지식에 대한 평가를 높이 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호논리학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석윤리학에서는 헤어의 입장을 ‘규정주의(prescriptivism)’라고 부른다. 규정주의는 가치에 대한 판단 속에는 인식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기본이 아니고, 오히려 규정적 측면이 기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치 판단은 참과 거짓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개는 동물이다’와 같은 사실판단에는 인식적인 요소가 있어서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거짓말은 나쁘다’와 같은 가치 판단은 인식적인 요소가 주가 아니어서, 사실판단처럼 시비를 논증할 방법이 없다. 이런 규정주의는 자연주의와 비자연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헤어에 의하면, 무어가 말하는 ‘자연주의적 오류’가 오류인 이유는, 자연주의가 가치판단을 일종의 사실판단으로 보고, 가치언어가 가지고 있는 평가적 의미(valuative meaning)를 간과한데 있다. 가치언어의 평가적 의미는 권장(commending) 혹은 비난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모한다스 간디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간디에 대한 사실을 단지 기술하거나 보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권장하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 판단은 단순한 사실을 기술하는 진술이 아니라, 이야기 하는 대상을 평가하는 진술이다.
가치언어가 권장하거나 비난하는 기능을 가진다 하더라도, 이런 기능은 논리적 실증주의의 윤리설인 ‘정의설(emotivism)’처럼, 말하는 이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또 듣는 사람에게 그와 유사한 태도를 가지도록 환기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정의설은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악이다’와 같은 도덕 판단은, 현상을 서술하거나 어떠한 사실을 알리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지 도덕 판단은 발언자의 감정을 표명하거나 듣는 이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판단은 ‘에이끼!’라고 부르짖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평가적 언어에는 서술적 의미(descriptive meaning)는 없고 오직 정의적(emotive) 의미만이 있기 때문에, 도덕 판단은 감정을 표명하거나 환기하는 발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헤어에 의하면 가치언어는 이것 이외에 두 가지 부가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가치언어는 감탄이나 명령, 훈계 그리고 그 밖의 감정 표현적이고 역동적인 언어와 구별된다. 두 가지 부가적인 일이란 첫째, 어떤 것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하여 그것을 권장하거나 또는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선택을 지도한다. 둘째, 그는 이유에 의해서 지지 받아야 하는 주장을 하며, 그러한 이유는 일정한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이점을 선과 관련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가 좋다고 부르는 많은 종류의 사물이 있다. 좋은 화가, 좋은 수학자, 좋은 만년필, 좋은 자동차, 좋은 책 등등. 이런 것들을 좋다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따라서 권장한다. ‘좋다’는 말의 기능은 적용되는 대상에 관계없이 모든 대상에 공통된다. 그러나 만일 ‘좋다’가 적용되는 사물에 있어서 ‘무엇이 그것을 좋도록 하는가?’, ‘그것의 무엇이 좋단 말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즉각 좋다고 불리는 서로 다른 부류의 사물에 따라, 그 대답이 서로 다를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헤어는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그 대상과 비교되는 사물들의 부류를 ‘비교의 부류’라고 부른다. ‘무엇이 그것을 좋게 만드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적하는 사물의 특성 또는 속성을 ‘좋게 만드는 특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좋다’의 의미인 권장의 기능은 비교하는 모든 부류 전체에 걸쳐 일정한 반면, ‘좋게 만드는 특성’은 비교의 부류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하여 화가가 가져야 할 속성은, 좋은 수학자가 되기 위하여 수학자가 가져야 할 속성과 다른 것이다.
각 비교의 부류에서 우리는 그 부류에 속하는 특성들 가운데 어떤 것이 좋게 만드는 특성인가를 어떻게 아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가치판단을 할 때마다 은연중에 호소하는 좋음의 기준 또는 평가의 표준을 통해서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좋은 수학자라고 판단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푸른 눈에, 6피트의 키에, 시카고 출신이며, 지능지수 190, 신을 믿지 않고, 위상수학에서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정리를 증명했고, 3명의 자식을 두었고, 다른 수학자들이 연구하기 위해 쓰고 있는 책을 집필했다는 등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러한 여러 특성 중 오직 세 가지만 그가 좋은 수학자가 되는데 적합(relevance)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특성은 적합하고 그 외의 것들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대답은 이러한 특성들은 어떤 사람이 좋은 수학자가 되기 위한 기준을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지능지수, 정리를 증명하는 능력 그리고 수학의 분야에서 권위 있는 책의 저자라는 것은 이상적인 수학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게 하는 특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다’는 말의 기준과 의미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가치판단을 완전히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1) 권장하거나 비난하는 기능인 가치어의 의미, (2) 가치어가 개별적인 사례에 적용될 때 참조되는 가치어의 평가의 기준, (3) 한 대상이 어떤 기준을 일정한 정도로 만족하거나 또는 만족하지 못하는 대상의 속성들인, 좋게 만들거나 나쁘게 만드는 특성, (4) 일련의 기준에 의해 상이한 가치가 결정되는 대상의 비교 부류가 그것이다. 따라서 가치 판단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가치판단이란 우리가 어떤 주어진 부류에 속하는 한 대상을 같은 부류에 속하는 다른 대상들과 비교할 때, 그 비교의 부류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을 평가하기 위한 표준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기준을, 그 대상이 어느 정도 만족하거나 또는 하지 못하는 ‘좋게 또는 나쁘게 만드는 특성들’을 지니기 때문에, 그 대상을 권장 또는 비난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가치판단이 어떻게 보편적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선택을 지도하는가를 살펴보자. 가령 내가 주어진 가격 안에서 어떤 만년필을 살 것인가 결정하려고 할 때, 어떤 이가 하나의 만년필을 가리키며, ‘이것은 좋은 만년필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나의 선택을 직접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내가 만년필을 평가하는 동일한 기준을 가졌다면, 그가 나에게 참말을 하는 이상 나는 그 만년필을 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가 ‘이것은 좋은 만년필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나 역시 만년필이 가져야 할 것으로 원하는 ‘좋게 만드는 특성’을 이 만년필이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만년필과 유사한 다른 만년필도 역시 좋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후자도 전자와 동일한 ‘좋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또 좋은 만년필에 대한 기준을 같을 정도로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을 내릴 때 의거하는 보편적 원리는 주어진 가격의 범위 안에서 어떤 만년필이 좋게 만드는 특성을 동일하게 가진다는 점에서 이것과 같다면, 그 만년필도 역시 좋은 만년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판단은 암암리에 보편적이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비교의 부류에 속하는 한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을 지도할 수 있다.
다음으로 헤어가 말하는, 가치판단이 하는 두 번째 부가적인 일을 생각해보자. 헤어에 의하면 비인식주의자들은 가치판단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비인식주의자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좋다’와 같은 문장에서, ‘때문에’라는 말이 지칭하는 관계는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 인과적 관계이다. 가치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다. 가치판단을 지지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가치판단에서 표현되는 특정의 태도를 가지게 하는 원인인, 어떤 사실 즉 소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도가 소견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하나의 태도가 다른 태도보다 더 적당하거나 또는 더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헤어의 규정주의는 가치판단의 정당화에 대해 매우 다른 분석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가령 어떤 것이 좋다는 가치판단을 할 때, 우리는 항상 그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는 당신은 그것이 어떤 점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물음들은 그 대상을 좋게 만드는 특성을 밝히라는 요청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을 지지하는 이유는 평가되는 사물을 좋게 만드는 특성을 밝히는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그 사물의 속성에 관한 경험적 주장이다. 여기서 사실과 가치가 서로 관련된다. 예를 들어 ‘모한다스 간디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판단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비인식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간디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단지 간디에 대한 소견만은 아니다. 그 대신 우리가 모든 사람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도덕적 표준에 의거해 볼 때, 그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특성들 예컨대 자비, 정직, 용기 등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간디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판단을 완전히 정당화하려면 판단하는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진술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사실에 대한 진술은 가치판단을 정당화함에 있어서 첫 단계일 뿐이며, 대상이 어느 정도 주어진 표준을 만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러한 표준에 대해 도전한다고 생각해보자. 만일 도전을 받는다면 그 표준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은 비교의 부류에 속하는 대상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표준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이것은 어떻게 표준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이유가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헤어는 대상에 표준을 적용할 때 내리는 가치판단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행위에 규칙을 적용할 때 내리는 가치판단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행위의 규칙은 우리에게 어떤 행위가 옳은지 또는 그른지를 말해준다. 헤어는 규칙과 표준을 합해서 ‘원리’라고 부른다. 원리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결정과 선택은 원리를 근거로 해서 정당화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원리: 자비롭고 정직하며 용기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사실: 모한다스 간디는 자비롭고 정직하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가치판단: 그러므로 간디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행위 규칙을 예로 들어보자.
원리: 거짓말은 나쁘다.
사실: X를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가치판단: X를 말하는 것은 나쁘다.
여기서 원리 자체가 문제시될 때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저 원리보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좋은 이유가 있는가? 자연주의적 윤리학은 경험적인 사실판단을 근거로 그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형이상학적 윤리학은 초자연적 사실판단을 근거로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전제 속에 없는 요소를 결론 안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무어가 말하는 자연론적 오류가 된다. 이에 반해 윤리적 직각론은, 윤리학적 최고 원리는 자명한 진리라고 본다. 그러나 개별적 행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자명하기에 앞서, 보편적 행위의 원리가 자명할 수 있다는 것은 조리에 어긋난다. 자명(自明, self-evidence)하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원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은 자기모순을 포함하므로, 그것의 배척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거나, 배척함이 현실에 있어서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논리적 자기모순이라면 분석적 명제라는 말인데, 분석적 명제는 아무런 내용이 없으므로 도덕적 원리로서 구실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심리적 불가능은 우연적인 문제인데, 심리적으로 물리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원리는 없다. 기존 윤리설들의 이런 한계 때문에 헤어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헤어는 먼저 원리가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임을 밝힌다. 따라서 원리는 어떤 근거에 의존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원리를 채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우리가 채택한 원리의 결과가 다소 불만족스럽거나 또는 변화하는 상황에 적합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결과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이런 판단은 가치판단이고 또한 다른 판단과 마찬가지로 어떤 원리를 기초로 해서 내려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원리를 근거로 해서 원래의 원리를 거부하거나 수정한다. 이 새로운 원리는 그 다음 그 효과나 결과에 따라 판단되고, 이러한 판단은 우리의 전체적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모든 원리가 총망라될 때까지 계속된다. 삶의 방식은 평가적 추론이 근거하는 모든 원리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삶의 방식이 다른 삶의 방식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평가와 선택이 의존하는 근원적인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각자는 그의 삶의 방식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결정하고 또 그의 결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 결정은 그것이 가능한 만큼 정당화된다. 결국 행위의 원리는 숙고에 입각한 결단(決斷)의 산물이다. 결단의 토대가 된 숙고는 결단의 이유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현재 사태와 장차 생길 결과에 관한 사실 판단으로 구성된다. 사실판단은 진위가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검증의 결과 숙고한 바가 거짓된 판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 숙고를 토대로 삼는 결단 내지 원리의 타당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단이 의거할 수 있는 모든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끝에 내려진 결단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근거 있는 결단이라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