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1)

이효범 2021. 8. 9. 06:24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1)

 

o 선에 대하여(11)

 

구녕 이효범

 

그리스도교(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는 30세가 되자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다. 예수가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태복음 3:17)라는 소리를 들었다. 침례를 받은 후에 예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을 하였다. 그 때 사탄이 와서 세 가지 시험을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려라. 내게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예수가 대답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마태복음 4:1-11) 이런 침례와 시험이라는 비보통적(extraordinary)’ 체험을 한 후에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와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이 복음이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것은 예수가 직접 가르쳐준 주님의 기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9-13)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최고선(最高善)은 천국(하늘나라)이다. 현세의 질서와 구별되는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신국(神國)이 된다. 신국은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롭게 거듭나서, 영생을 누리는 나라이다. 그런 천국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그것을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회개가 먼저이다. ‘회개, 원문 메타노이아(metanoia)’가 의미하듯, 우리 내면의 완전한 의식의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완전히 배제된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는 이 점을 포도나무를 들어 비유하고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먼저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1-8)

 

예수는 천국의 건설을 위해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것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겸하여 섬기지는 못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 사람이 삶에 필요한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6:31-3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중요시 할 것은 세속적인 가치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엄격한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요구에 인간을 순종케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구원과 멸망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는 정의로운 심판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인 하나님 앞에 인간 존재의 모순을 드러낸다. 예수는 인간을 결정적인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예수는 구체적이며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관계하며 그러한 인간에게 강하게 회개를 요구한다. 그런 인간은 단적으로 말해서 회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 회복되어야 할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에는 그러한 인간을 보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예수는 인간에게 회개를 요구했지만 결코 인간을 악한 존재로 본 것은 아니다. 단지 병들었을 뿐이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정결하지 못했다. 잔치에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저희 서기관들이 제자를 비방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누가복음 5:30) 이에 예수는 대답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2) 이런 예수는 아무도 경멸하지 않았고,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세상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했고, 문둥병자들을 가까이 오도록 했으며, 어린아이들을 사랑했고, 창녀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는 섬김을 받으러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으며, 끝내 사람들의 대속물로 고난 받고 죽기까지 하였다.

 

창조주에 의해 피조된 인간은 육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영에 따라 살 수도 있다. 만일 인간이 육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죄가 된다. 죄의 기원은 피조된 인간이 자기의 인간된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거나,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지 않고 섬기려 하거나, 모든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창조주에 대한 도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는 도덕적 악()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함으로써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의 기원을 소급하여 올라가면 천사의 세계까지 가게 된다.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격인 사탄은 원래는 피조된 천사들 중 가장 완전하고, 지혜롭고, 권세 있는 세 천사(미가엘, 가브리엘, 루시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적자가 되었다. 결국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여 암흑과 세상의 왕이 되어, 사람을 유혹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려고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금지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과 사()가 인간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있음을 교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면 영육 간에 영원한 죽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명시된 것이다. 인간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나님이 만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했는데, 사탄은 이것을 매개체로 하여 계약의 당사자인 아담을 꾀려고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럴듯한 거짓말로 유혹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4-5)

 

최초에 지은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참지식과 의()와 거룩을 상실하였고, 전인격이 부패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영적인 선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이 죄책을 짊어지고 사망의 법아래 종노릇하게 되었다. 생명나무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이후 저주받은 세상에서 얼마 동안 인생고를 겪으면서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경의 말씀에도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시고, 전선(全善)하신 분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참사로 무고한 학생들이 죽었다. 죽은 자식을 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통고하는 어머니에게 그리스도교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서양 중세의 교부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이런 악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였다. 그리고 악은 존재의 결핍(privatio entis)’이라고 결론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에 세상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과 상대적 존재인 피조물 사이에는 존재적 거리 때문에, 그리고 논리적 필연성 때문에, 피조물의 결핍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세상의 것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은 자기 스스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상에는 적극적으로 빛만 실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어둠은 그 빛의 결핍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도 적극적으로 존재하는 선의 결핍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신의 결핍을 자유의지로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재량권이 부여되었다. 그런 재량권은 더 충만한 존재로 상승하느냐 아니면 결핍의 세계로 나락하느냐 하는 선택적 운명을 뜻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상승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뱀의 꼬임에 넘어가 나락의 유혹에 빠졌다. 이것이 원죄이고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답변이 지금 세상의 악 때문에 실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단원고 부모님을 위로할 수 있을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한 바울은 이런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이 되었고, 죄는 관계의 파괴와 상호 분리인 사망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죽음)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이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을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로마서 5:12-14)

 

바울에 의하면 삶의 덧없음과 일시성을 하나님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허망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옛사람이다. 이에 대립되는 새사람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를 향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원리에 지배받는 사람이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에베소서 4:23-24)인 것이다. 바울은 서신 속에서, 생명력을 주는 영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가장 긴밀한 결합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러한 새사람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여 묘사한다. 즉 그는 죄와 죽음의 지배하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하여 구속받은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에 참가한 자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눈 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갈라디아서 2:20) 자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영은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얻은 선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새로워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재탄생의 목욕과 성령의 새로워진 집에 의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비물질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태도와 목표를 가진 전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노와 악의와 훼방, 또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서 3:8-10)”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기희생과 사랑이 넘치는 교제와 서로를 섬기는 겸손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은 믿음의 성숙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삶의 기쁨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새롭게 하는 힘으로 인간은 미래에, 영혼뿐만 아니라 몸을 포함하여 전인이 부활한다. 바울은 부활의 몸에 관해 말할 때 현재의 몸과는 달리 영적인 몸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정당성을 버리고 신의 자비에 응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새로운 체험을 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는 죽음을 넘어 부활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희망이 있고 또한 진정한 자유와 화평이 있게 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