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9)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9)
o 선에 대하여(9)
구녕 이효범
원시 불교에서 선(善)은 늘 불선(不善) 즉 악(惡)과 대비되어 설명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선을 이해하려면 악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원시 불교 경전에서는 선은 kusala, 불선은 akusala, 악은 papa, id로 나타난다.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명한 게송이 있다. “온갖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靜其意 是諸佛敎)”(법구경 제 183게, 七佛通偈) 여기서 악과 선은 대비되어 나타난다. 악은 일반적으로 불선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조금 다르다. 악은 보통 악행을 가리킨다.
악행은 윤회설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인도인들은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행위를 하면 업(業, karma, kamma)으로 남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인(因)으로서 세력을 가지고 윤회(輪廻, samsara)를 한다. “자기가 행동한 대로 그대로 된다. 선을 행한 자는 선하게 되고 악을 행한 자는 악하게 된다.”(부리하다란야키 우파니샤드) 윤회란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6세계를 끝없이 도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천법계(天法界)에 태어나려면 십선(十善)을 닦아야 한다. 인법계에 태어나려면 五戒를 지켜야 한다. 교만한 행동을 하면 수라(修羅)에 태어난다. 우치(愚癡)한 행동을 하면 축생이 된다. 간탐(慳貪)한 행동을 하면 아귀(餓鬼)로 태어난다. 십악을 범하면 지옥(地獄)에 간다.
십악은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 입(말)으로 짓는 네 가지 악행, 그리고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을 합한 것이다. 몸으로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한 업을 짓는다. 말로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의 업을 짓는다. 생각으로는 탐심(貪心), 치심(瞋心), 치심(癡心)의 업을 짓는다. 이런 열 가지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열 가지 선행(善行)이다.
악행이 구체적인 나쁜 행동을 지칭한다면, 불선은 이러한 악행이 생겨나는 근원을 문제 삼는다. 일반적으로 악행은 사람의 사악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불교는 먼저 이러한 사악한 마음을 주시한다. 앞의 칠불통게에서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불교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악행은 마음의 사악함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번뇌라고 부른다. 모든 악행은 번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모든 악을 짓지 말라는 말은, 악행을 일으키는 번뇌를 분명히 응시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보통 108가지 번뇌를 거론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탐욕(貪慾), 성냄(瞋), 어리석음(痴)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모든 불선의 근본이 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삼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부터 이것을 삼독(三毒) 혹은 삼화(三火)라고 하여, 구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장애물로 꼽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번뇌는 다시 무명(無名)과 갈애(渴愛)로 요약된다. 무명은 진리에 눈이 어두워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갈애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사태에 집착하여 욕망의 만족을 강하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명은 지적 미혹이고 갈애는 정적 미혹이다. 이러한 미혹 때문에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게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미혹은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근본악은 아니다. 무명이나 갈애는 깨달은 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 불교의 일부 종파는 무명을 무시이래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인도 철학의 어떤 학파에서도 그렇게 해석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분명하게 실천적 수도에 의해 무명이나 갈애가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초기불교는 세상을 연기로 설명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연기란 말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인데, 연기를 말하는 산스크리트어 ‘쁘라띠땨 사무뜨빠다(Pratitya samutpda)’도, ‘Pratitya’는 ‘~때문에’ ‘~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연기란 일체의 존재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우연히 혹은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하거나 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리불(Śriputra, 舍利弗)는 ?노속경蘆束經?에서 비유를 들어 연기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한다면 다른 갈대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연기의 전형적 모습은,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라고 표현된다. 이 연기의 공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곧 “말미암아 생긴다”는 측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곧 “말미암아 멸한다”는 측면이다. 『잡아함경』 335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이런 연기는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를 시간적인 생성 관계와 공간적, 논리적인 유무 관계로 규명한 것이며, 상호 의존적인 상의성(相依性)을 나타내고 있다. 즉 연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생멸변화의 흐름에 바탕하는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과와는 상관없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계까지도 포괄하여, 원인과 조건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결과적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순한 인과율과는 다르다. 불교는 연기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상호 조건 지우는 관계로 파악한다.
이런 연기법에 의하면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관계하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도 마찬가지이디. 그런 의미에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나는 무아(無我)인 셈이다. 이런 도리를 망각하고 나라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때, 불교에서는 그것을 아만이나 아집이라고 부른다.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 무지이다. 이러한 무지가 진에가 되기도 하고 탐욕이 되어서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세상이 연기로 되어있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선의 근본을 무탐(無貪), 무진(無瞋), 無痴(무치)라고 하는 것도, 바로 연기의 도리로 나와 세상을 보라는 의미이다.
초기 원시불교가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방도로서 팔정도(八正道)를 강조했다면,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목표로 하는, 자기완성 못지않게 중생 제도라는 이타적인 삶을 사는 보살이 실천해야 할 6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이 그것이다. 이런 규범들은 우리가 비록 선행을 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아직도 무지로 인한 삼독의 불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선행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시는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법을 말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행을 하고 내가 선행을 하였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결코 선행이 아니다. 보시를 하고도 보시를 했다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면 이런 보시는 업으로 남지 않는 청정한 무루(無漏)의 행위이다. 바다 위에 배가 지나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런 무루의 선행을 할 때, 인간은 고통스런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가장 뛰어난 선행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루 출세간의 선행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