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3, 연비어약)
o 연비어약 鳶飛魚躍*
또박 이효범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뛴다
어릴 때 우리 마을의 풍경이다
나는 놈과 뛰는 놈의 본성이 같다
비약이다.
비약은 논리를 벗어난다
논리를 벗어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름답고 나는 가난하다
젊은 날 우리 둘의 풍경이다
가난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한다
비약이다.
* 본래 이 말은 시경에 있는 말로서, 율곡 이이는 ‘나는 솔개와 뛰는 물고기의 본성이 같다’고 해설하였다.
o 후기:
철학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권장할 일이 못됩니다.
觀山 곽신환 교수가 우리 시대의 율곡인 것은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연말에 율곡을 인용하여 ‘鳶飛魚躍’이라는 말을 해설하였습니다. “시경에 있는 이 말은 훗날 유가 사서의 하나인 중용에서 진리의 영역이 넓고 크고 활발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활용되었고, 어약은 鱗으로 연비는 羽로 축약되어 性同鱗羽 곧 본성은 헤엄치는 물고기나 하늘을 나는 깃털달린 새나 모두 같다는 성리철학의 주요표현이 되었습니다.” “성동린우는 이율곡의 말인데 그는 이 말에 이어서 愛止山壑 곧 사랑이 천산만학에 두루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는 율곡과 곽교수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새해가 되어서도 계속 화두처럼 이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햇수로는 무려 2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 이제 계급장 떼고 따져 봅시다.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치고 새는 하늘에서 납니다. 물고기나 새는 모두 생명체입니다. 생명이라는 본성에서는 동일할 겁니다. 그런 본성은 하늘(天)이 命하였던지 진화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고 새는 물속에서 헤엄치지 못합니다.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명의 세계는 수많은 종과 셀 수 없는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차이가 납니다. 만일 어떤 두 개체가 同一하다면 그 중 하나는 잉여물이거나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존재물들은 다른 것과 다른 고유한 본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이것은 비록 생명체 전체의 본성은 아니지만, 생명체 전체에서 분리된 본성으로, 각각의 생명체에 주어진 分有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형식적인 본성을 말해서 실제 세계에 무슨 효용적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데 율곡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랑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솔개(鳶)는 아무 일없이 하늘을 나는 게 아닙니다. 호시탐탐 물속의 고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솔개에게 잘못한 게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 죄 없는 붕어는 한 순간 솔개의 밥이 됩니다. 자연은 그야말로 먹느냐 먹히느냐 잔인한 투쟁의 공간인 것입니다. 생태계의 피라미드에서 사람 같은 최고의 위치에 처한 포식자나 한가롭게 사랑을 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람도 다른 사람이나 바이러스의 습격 때문에 한시로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잔인한 모습은 단지 피상적인 현상일까요. 생존의 욕망 너머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명 그 자체는, 아니면 자연을 가능케 하는 원리나 道는, 아니면 세상의 근원인 마음의 본체는, 아니면 세상을 창조하신 神은 정말 사랑일까요. 과연 율곡의 믿음처럼 하늘은 사랑으로 만물을 생성하고 생육시킬까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1억 5000만 마리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를 차지하려고 경쟁했습니다. 셀 수 없는 다수의 희생 위에 나는 태어났고 살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생명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삶의 궁극적인 목적도 사실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무한한 시간과 절대적인 공간 속에서 의미 없이 찰나를 살다가 후손만 남기고 죽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觀山은 왜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 새해부터 우리를 괴롭힐까요. 나는 아무래도 고등학교를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거기서 골치 아픈 철학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매일 매일 예쁜 여자나 생각하면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