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7)

이효범 2021. 7. 30. 10:14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7)

 

o 선에 대하여(7)

 

구녕 이효범

 

영국의 공리주의 창시자 벤담( Jeremy Bentham)은 쾌락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의 이어받는다. 그는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의 지배 아래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고통과 쾌락뿐이다. 한편에서는 선악의 기준이, 다른 한편에서는 인과의 사슬이 이 옥좌에 걸려 있다. 그들은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고 사고하는 것 모두들 지배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벤담은 에피쿠로스와는 달리,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쾌락)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개인의 쾌락을 희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개인의 쾌락 추구가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공중적(公衆的) 쾌락 추구와 연결되지만, 만일 상충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궁극 목적은 개인의 쾌락이기 보다는 공중적 쾌락, 즉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많은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벤담의 쾌락주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功利主義, 公利主義)라는 새로운 형태의 쾌락설로 불린다. 벤담은 쾌락이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쾌락의 종류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양적인 차이만 중요시 하였다. 쾌락은 오로지 양으로만 계산할 수 있는 단일한 성질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압정놀이도 쾌락의 양만 같다면 시 쓰는 일과 마찬가지고 좋다(Quantity of pleasure being equal, pushpin is as good as poetry)”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에 스펜서(Herbert Spencer)돼지의 철학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면 왜 벤담은 돼지의 철학을 주장했을까? 그는 결코 천박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마음이 상냥한 그는 평등주의와 약자보호를 강조한 철학자였다. 그는 당시 상류층에게만 제한되었던 대학 교육의 문을 중산층에게도 확대하는 일에 참가하여 런던대학의 창립에 관여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1표씩만의 선거권을 가지는 평등선거를 옹호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며, 어느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는 계산되지 않는다.” 또한 당대의 수감자들의 처참한 처우를 개선하고자 그들의 거처를 감옥이 아닌 교도소로 바꾸고자 하였고, 위생적 화장실과 환기시설을 갖춘, 시민들에게 공개되는 개방형 공간인 원형 교도소를 직접 설계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동물의 처우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국사회가 전통과 관습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사회공리를 극대화시키지 않는 제도와 관습을 타파하려고 한 철학적 급진주의자(philosophic radicalist)였다. 벤담의 철학을 이어받은 밀의 평가에 의하면, 그는 이론과 제도의 모든 측면에서 영국 개혁의 선구자였다.

 

그런 벤담이 돼지 철학을 하게 된 논거는 이렇다. 영국 사람들이 무조건 전통에 따르는 것은 개인에 있어서나 집단에 있어서 의사결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 결절이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갖는 무수한 욕구나 목적들이 서로 충동할 경우 그것을 조정하고 해결해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목적들의 우열을 비교하여 합리적인 인생계획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모든 다른 욕구나 목적에 우선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욕구 혹은 지배적 목적(dominent end)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배적 목적은 인간적 여러 가치에 배치되지 않고, 우리의 도덕적 감정이 용납하는 한에서 객관적인 계량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즉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서 원리상 그 존재다소(存否多少)가 실증 가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쾌락이고, 그런 쾌락의 다소가 계산될 수 있으려면 양적 차이만 인정해야지 질적인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벤담은 양적 쾌락주의를 주장했지만, 벤담 사상을 이어받는 밀(J. S. Mill)은 쾌락의 질적(質的)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관능적 쾌락과 지적인 쾌락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을 돼지로 전락시킬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고유한 삶을 구하기 위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내용을 수정한다. “행복이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며, 불행이란 고통을 그리고 쾌락의 결여를 의미한다. (---) 인간은 동물적인 욕정보다 더 고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단 그 능력을 자각하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 어떠한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Utilitarianism) 그러면서 밀은 행복(eudaimonia)이란 단지 쾌락의 종합은 아니다. 행복은 쾌락 또는 고통의 부재인 정신의 한 상태(a mental state)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질적으로 높은 쾌락을 가져오는 어떤 욕구의 충족( having what one wants)”(앞의 책)이라고 정의한다.

 

밀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은 지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단순한 동물로 전락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양적으로 많은 쾌락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높은 쾌락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바보나 저능아나 무뢰한이 자기들보다 더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총명한 사람이 바보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무식한 자가 되려고 한다든가, 동정심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 비열한 이기주의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보다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게 되려면 열등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며, 아마 고통에는 더 민감할 것이며, 또 더욱 많은 점에서 고통을 느끼기 쉬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좀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보다 저열한 존재라고 생각되는 것에로 전락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앞의 책)

 

이리하여 밀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양질의 쾌락을 추구한다고 결론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단 하나의 명확한 행동의 준칙, 혹은 도덕의 기준은 최대행복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행복의 철학적인 평가가 요청된다. 행복의 양 못지않게 질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하며, 질적으로 높은 소량의 쾌락이 질적으로 낮은 다량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질에 관한 평가는 두 가지의 쾌락에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만족한 돼지가 되기보다는 불만 있는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아마 불만 있는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돼지는 쾌락의 한 가지 측면, 즉 양적인 차이밖에 모르지만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알기 때문이다.” (J.S.Mill, “Mill’s Journal”, in Mill’s Ethical Writings, ed, J.B.Schneewind, Collier, 1965, p.343.)

 

그러면서 밀은 행복이 선임을 입증했다고 자랑한다. 물론 그것은 엄밀한 과학적 의미로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광의의 증명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보일 수 있다는(visible) 것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대상을 본다(see)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릴 수 있다는(audible)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hear)는 것이다. 우리 경험의 다른 원천들도 모두 이와 같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는(desirable) 것을 밝혀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바란다는(desire)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왜 일반의 행복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제시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우리는 행복이 곧 선임을 증명하기에 필요한 모든 증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행복은 그 개인에 대해서 선이요 일반의 행복은 모든 사람 전체에 대해서 선이다. 이로써 행복은 행위의 궁극목적의 하나이자, 또한 도덕의 기준의 하나로서 자신의 입지를 입증하였다.” 이런 밀의 자신만만한 주장은 그 후 분석윤리학자인 무어(G.E.Moore)에 의해 날카롭게 반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