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8. 의무경찰)
o 콩트(8, 의무경찰)
구녕 이효범
운이 좋아 이른 나이에 지방 명문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지방에 가면 10년 간 한 눈 팔지 말고 학문에 몰두하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나도 그러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대학 교수의 본분은 크게 세 가지였다. 강의와 연구와 사회봉사. 철학을 하는 내가 사회에 봉사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대학은 중등학교 선생님을 길러내는 목적 대학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연구보다는 좋은 강의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학교였다. 강좌도 전문적인 분야로 세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전공한 서양 분석철학을 천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학과 전공과목 이외에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맡았다. 참으로 막막했다. 사실 이런 과목은 철학의 대가나 할 수 있는 강좌였다. 동서양 철학과 한국의 철학에 박식하고, 자연과 인간과 사회에 통달한 학자가 전체적이고 균형 잡힌 안목에서, 학생들의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해서, 독립적인 삶을 준비하는 그들이 나름대로 자기의 인생관을 세워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특히 동양철학과 한국철학에 무지하고 아직도 확고한 인생관은커녕 결혼도 못한 주제가 아닌가? 지혜가 충만하여 수업에 들어가면 강의하기도 전에 겉모습만으로도 학생들을 사로잡는 그런 교수이기커녕 학생들의 눈빛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두 눈은 늘 창문 밖 하늘만 쳐다보는 뭔가 들 떨어진 존재 아닌가? 하이데거는 첫 수업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자기 인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학생들이 질문을 하지 않자 수업을 하지 않고, 다음 시간에도 질문을 하지 않자 한 주를 쉬고, 또 하지 않자 한 달을 쉬고, 그래도 하지 않자 한 학기를 그냥 마쳤다고 하는 전설 같은 말이 전해지는데, 나는 학생들의 질문을 기다리기는커녕 준비해간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쩔쩔매는 멍청이 아닌가?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영혼 없이 내가 학부에서 배운 그대로, 시대별로 전개되는 서양 철학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아테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단된 현재 한국은 그들이 만난 문제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사실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그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사색하고 대안을 창출했다. 그 결과물이 철학인 것이다. 나는 또 철학 수업은 칸트의 말대로, 고기를 잡아다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칠 때 진정한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성에 기반 한 엄밀한 과학 지식도 수없이 변천하는데, 철 지난 철학적 지식이 얼마나 진리를 담보하고 있겠는가? 그래서 과거의 철학 지식은 오늘의 자기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지식으로만 배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영문과 선배가 철학 수업을 들었다. 그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 카뮈의 부조리의 철학을 진지하고 재미있게 들었다. 이것은 수업의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막상 학기만 시험에는 이 주제가 쏙 빠져 있었다. 이 분야를 나름대로 밤새워 준비해 간 선배는 당황했다. 그리고 시험이 엉뚱한 분야에서만 난 부조리에 분개했다. 그래서 선배는 F 맞을 각오를 하고, 문제가 요구한 대로 답을 쓰지 않고, 시험 문제를 낸 교수를 비난하는 것으로 온통 채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A+를 받았다고,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고 선배는 내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철학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 비록 강단에서는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철학을 가르치지만, 정신만은 불교의 선사들의 기골을 닮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 선종의 역사를 보면 초조 달마가 나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불사를 많이 했던 양나라 무제를 만나, 단지 선한 행위를 쌓는 것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고 일갈하고 소림사로 들어가,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선정을 닦았다. 참으로 장대한 수도승의 모습이다. 2대 혜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달마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순순히 물러날 혜가가 아니었다. 밤새도록 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큰 눈이 내렸다. 그는 눈 속에서 가지고 다니던 칼로 왼팔을 잘라 구도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예는 선종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나라 선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진리 앞에서는 스승도 제자도 없다. 서양 고대 철학도 그런 분위기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들어와서, 플라톤으로부터 아카데미의 정신이라고 불렸던 위대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소중하다. 그러나 진리는 더 소중하다(Ame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tas).”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 소신을 추구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직접 보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라는 위대한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 영미 분석 철학의 창시자 중의 하나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만만치 않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억만장자의 아들로 탄생했다. 처음에는 기계공학도였으나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기초 수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져,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는 버트란트 러셀을 찾아갔다. 스승이자 친구인 러셀을 거침없이 비판했던 그도 한 때는 자기가 철학하기에는 너무나 재능이 없다고 절망했다. 그러자 러셀은 방학 동안 에세이 한 편을 써오라고 제자에게 요구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써온 에세이의 첫 문장을 보고 러셀은 감탄하며 외쳤다. 제자의 천재성을 알아 본 것이다. 그런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어 진행하는 철학 수업은 그야말로 남의 이론을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을 쥐어짜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은 참석자 모두 철학함에 몰두했다. 그런 그가 교수가 되어 미국으로 떠나는 제자에게, 강단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그만두라고 권고했다. 그러니 철학한다는 것은 공자 말대로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이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나의 철학개론 수업도 정신만은 적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천재도 아니고 천성적으로 게을렀다. 어느 덧 타성에 젖어 철저하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모두 아는 것처럼 지껄이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권고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기부한 정도로 거부이고 독신이니까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난했고 이미 결혼하여 책임을 져야 할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그 후 사범대학은 종합대학이 되고, 철학개론 수업은 많은 학생들이 수강했으나, 계속 허공만 쳐다보며 강의한 나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사람은 몸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 나는 강의와 연구를 하는 한편 몸을 위해 운동으로 테니스를 했다. 대학교에 테니스 코트가 여려 면 있고 그 때는 많은 교수들이 테니스 할 때였다. 나 같은 초보자가 끼려고 하면 잘 치는 선배 교수들은 텃새를 했다. 한 게임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에 흰 석회가루로 줄도 긋고, 카운터도 봐주고 하면서 정성을 보였다. 그러면 선배 교수들은 큰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짝이 되어 쳐주면서 맥주나 저녁내기를 걸었다. 그것도 황송하여 우리는 깍듯이 선배를 모시고 지속적으로 테니스를 연마했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 월례회를 가졌다. 그럴 때는 예산에 있는 산업대학 교수들도 오고, 천안에 있는 공대 교수들도 왔다.
내가 테니스 총무 할 때의 일이다. 월례회가 끝나고 회식을 했다. 학교에서 좀 떨어진 의당에 있는 보신탕집이었다. 우리가 여름에 테니스를 치고 자주 가는 맛집이었다. 우리는 모두 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건배를 했다. 그러자 예산에서 다른 교수의 차에 묻어온 술을 좋아하는 한 교수가, 먼데서 온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총무가 총대를 메야 했다. 소주잔이 여러 번 오고 갔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는 다른 교수들도 눈치만 보고 있다가 때는 이 때다 싶었는지 합석했다. 술꾼들은 기분 좋게 취했다. 잔치는 화기애애하게 끝났고 모두 떠났다. 돈을 계산하고 나는 망설였다. 적어도 소주 한 병 이상은 마신 것 같은데 차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대전에서 공주까지 버스로 와서 공주버스정류장에서 택시로 여기 의당까지 올 생각을 하니, 그리고 10시에 첫 수업을 해야 하는데, 아찔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찬 물로 세수를 한 다섯 번 쯤 했다. 이빨도 그 정도 닦았으리라. 맹물도 벌컥벌컥 마시고 자판기 커피도 세 잔 먹었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학교까지만 가면 된다. 연구실에는 예전에 학장님이 학생지도 잘 하라고 주신 침대가 아직도 있었다. 거기서 밤 1시까지 자고 한밤에 술이 깨서 집에 가면 된다. 그러나 의당에서 공주 시내까지 오는 길은 정안천 곁에 난 외길뿐이었다. 조심에 조심을 더해 사방을 주시하면서 오고 있는데 멀리 시내 입구 KBS공주지부 앞에서, 의무경찰이 빨간 경광봉을 휘두르며 교통단속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자처럼 본능적으로 도망갈 생각 이외에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급히 차를 길가로 몰아 세웠다. 그리고 뒤를 향해 도망쳤다. 의경도 내가 차를 갑자기 세우는 것을 보았는지 소리치며 쫓아왔다. 토끼 같은 의경 앞에 거북이 같은 내가 얼마나 도망갈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마지막으로 길가 어느 음식점 속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력을 다해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화장실에 숨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제 세상의 끝이구나, 절망하고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니, 교수님이.” 그 의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우리 과 학생은 아니었다. 머뭇거리며 학교에 가야한다니까 의경은 “교수님, 조심해서 차를 몰고 가세요.” 꾸벅 경례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빨리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언제나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알면 행한다고 했지만 평범한 우리에게는 매번 희, 노, 애, 구, 애, 오, 욕이 문제다. 공자도 70이 되어서야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내일 모레면 나도 70이 된다. 아직도 나는 천방지축이다. 퇴임할 때 받은 훈장을 보면 나는 나의 엉터리 철학개론 제자였던 그 때의 의경이 생각난다. 미안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