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7. 술버릇)
o 콩트(7. 술버릇)
구녕 이효범
옛날부터 술은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배워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는 술을 하셨다. 그것도 약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자주 하셨다. 그 일로 어머니는 몹시 힘들어했다. 그래서 자식들은 절대 술을 못하게 하셨다. 나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과에 들어가니 친구들은 인생에 무슨 고민이 그리 많은지 온 천지가 술이었다.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술에 취해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입에 거품을 품고 개똥철학을 주절대는 것이 재미있기는 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사양했다. 눈총을 받아도 안주를 많이 먹었다. 돈 없는 학생들의 안주야 뻔했지만 그러다가 술이 과하면 꼭 토했다. 몸이 술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대학에 전임으로 오니 환경이 일신했다. 1980년 대 초 공주에는 고급 한식집이 몇 채 있었다. 그곳에 가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옆에 붙어 아양을 떨면서 술도 따라주고 요리도 입에 넣어주었다. 선배 교수님들도 보고 있어서 처음에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곧 그런 문화에 익숙해졌다. 몸도 차츰 술을 먹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학교에는 술을 좋아하는 교수가 많았다. 고대 역사를 가르치는 원로교수는 목소리가 커서 강의할 때는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강의 내용도 야한 것이 많아 여학생들이 고개를 잘 들지 못할 정도였다. 술도 즐겼다. 한번은 너무 마셔 비틀거리다가 개천에 빠졌다. ‘교수 살려’ 큰 목청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바람에 온 학교에 소문이 났다. 또 우리 가까운 몇 사람만 아는 비밀은 선비 같은 문학교수의 이야기이다. 평소에는 점잖고 멋쟁이 신사인데 기생집에서 술을 드실 때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옷을 홀딱 벗고 술을 마신다고 한다. 나는 그분과 함께 술을 하고 싶었으나 원통하게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서 실현할 수 없었다. 또 어떤 거구의 젊은 신인 교수가 겁도 없이 애주 클럽을 만들자고 교수휴게실에 방을 붙였다가, 교수들의 융단 폭격을 맞고 포기하기도 했다. 교수에게는 자기만의 연구실이 주어진다. 그 방에 들어가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연구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평생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공동으로 투쟁할 일도 없고 함께 조업해서 생산성을 향상할 일도 없다. 모두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스러운 공간에서 각자가 왕인 셈이다. 그러니 교수들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꽉 맞혀있고 고집만 황소처럼 세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고집이 있기 때문에 외롭고 고된 학문의 길을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진정한 교수라면 기이해야 하고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술에 대해서도 그랬다. 내게 교수의 특이한 술버릇은 오히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또 사실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은 성인 남성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술로는 웬만한 실수를 해도 모두 용납되던 호시절이었다.
대학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몇몇 교수와 함께 초자연현상연구회를 조직했다. 초자연현상은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자연과학이 다루는 영역을 넘는 현상을 말한다. 결과적으로는 기(氣)나 명리, 풍수, 관상, 성명 등으로 범위가 좁혀지기는 했지만, 사실 이 영역은 우주의 본질이나 UFO, 예언, 기적, 이적, 염력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분야를 통칭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대학은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고 있는 계룡산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서 최적의 여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씩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초빙하여 시범도 보고 토론도 했다. 그 날은 계룡산 주변에 사는 쇠를 먹는 사람을 초청했다. 그는 이빨로 날카로운 면도날을 끊어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런 낯선 현상을 보니까 말문이 막혔다. 어떤 이는 일반 사람들이 갖지 못한 강한 소화액으로 쇠를 녹인다고 했다. 어떤 이는 잘게 씹혀진 쇠가 결국 대변과 함께 항문으로 나온다고 했다. 어떤 이는 몸속에 들어가 있는 쇠를 순간적인 물체이동으로 밖으로 내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우리는 참석한 분들과 함께 단골인 한적한 고기집을 갔다. 그 도사도 먹는 것은 우리와 똑같았다. 회식이 끝나고 우리 몇 사람만 남았다. 손님들을 접대하느라고 쾌 술에 취해 있었고 시간도 늦어 있었다. 그런데 그 집 반 지하 홀에는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홀가분한 기분에 오랜 만에 가무를 즐기기로 했다. 음식점 샷터는 내려지고 써빙하던 여자가 맥주 한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164cm의 키에 적당히 볼륨도 있으며 농담도 잘 받는 활달한 여자였다. 여자도 몇 잔을 마셨는지 볼이 이미 붉으래한 상태였다. 여자는 ‘남행열차’를 신나게 불러 제켰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싱싱한 가물치 같은 허벅지를 흔들며 들이대는 춤은 우리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기분이 고조될 대로 고조된 나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갑자기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여자는 망측스럽다고 도망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마지막 팬티만은 벗지 못했다. 얼마 후 사과하려고 그 집에 들렀더니 여자는 이미 그만 둔 상태였다.
그 후 나는 친구 교수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 윤리(倫理)과 교수가 아니라 윤락(倫樂)과 교수라고 조롱했다. 간혹 여자가 있는 술집에 가면 친구들은 내게 술을 따르면 또 옷을 벗는다고 놀렸다. 그러나 억울했다. 술만 취하면 습관적으로 옷을 벗는 나는 아니다. 38년 대학근무 중에 딱 세 번 벗었다. 그러니 한 십년 만에 한번 씩 벗은 셈이다. 지금은 돈을 받고 벗으라고 해도 몸이 너무 초라해서 내가 사양할 판이다. 그런데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되게 나의 영혼을 한 순간 온통 사로잡았던 그 첫 번째 고기집의 여인은 지금 무얼 하는지 나는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