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6. 대자보)
o 콩트(6. 대자보)
구녕 이효범
1982년, 호적으로 만 28세의 총각 때 전임강사가 되었다. 대학은 지방에 있지만 명문이었다. 나는 대학원 석사 과정만 마친 상태였는데 운이 좋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했지만 지적으로는 매우 우수했다. 여학생들은 특히 장녀가 많았다. 학교만 마치면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중등학교에 선생님으로 발령을 내니까 학생들은 학업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나도 현학적으로 전문적인 철학을 탐구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학교 환경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에 지도교수님은 오히려 잘 되었다, 한적한 곳에서 10년만 한눈팔지 말고 학문에 매진하다보면, 무엇인가 보일 거라고 당부하셨다. 그러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강의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마치고 나면 언제나 부끄러웠다. 준비한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그것도 화장을 짙게 한 여학생들이 빤히 쳐다볼 때는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주시하지 못하고 언제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니 학생과 선생의 교감이 오가는 활기찬 수업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참으로 한심한 초보 선생의 빈곤한 수업이었다. 그러나 나만의 연구 공간이 주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책을 보았다. 그 때 새로 만들어진 무용교육과에 늦게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있었다. 어느 날 학생 한 명이 보온병에 커피를 넣고 늦은 시간에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정색을 하고 더욱 근엄한 자세로 오직 객관적인 학문만 얘기하고 보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 때 나는 왜 따뜻한 감정으로 그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지 못했던가, 지금도 후회를 한다.
80년대 대학은 내가 대학생이었던 70년대처럼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교수는 학생들의 담임교수가 되어 과도한 사회참여를 통제해야 했다. 심지어 대학은 학생지도를 잘 하라고 연구실에 침대를 제공할 정도였다. 나는 갈등했다. 나도 대학 1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에 반대해서 열렬히 데모한 적이 있었다. 데모하던 학생들은 대학이 휴교한 이후에도 학생회관에 모여 단식에 들어갔다. 한밤에 외국인 총장 신부님이 들어오셔서 호소했다. 집에 걱정하는 부모님이 기다리신다. 군대가 학교 문을 박차고 들어와도 총장은 이제 더 이상 막을 힘이 없다. 간절히 호소했다. 많은 학생들이 빠져 나갔다. 단식이 하루를 넘으니까 날씨는 추워지고 육체가 지쳐갔다. 다시 밤이 오자 동지들은 두 패로 나누어졌다. 오래 단식을 지속한다는 사실을 밖에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한 밤에 몰래 먹을 것은 먹으면서 데모하자는 현실파와 내일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야말로 꼿꼿하게 아무 것도 먹지 말고 투쟁하자는 이상파였다. 나는 이상파에 동조했으나, 친구들이 점점 이탈하고, 단식이 이틀을 지나니까 세상이 노라지고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버틴 우리 소수 대원들은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고 해산했다. 애국가를 부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이상한 일이었다. 또 그 때 왜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한 분도 나타나지 않았던지 야속하기만 했다. 80년대 전두환의 통치도 정당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교수가 아닌가. 학생들처럼 거리에 나가 보도 불럭을 깨서 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들을 최대한 이해하기로 했다. 사실 그들은 공부가 하기 싫거나 자기 영달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심 없이 조국과 정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비록 학생 지도는 집권자들의 나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좋은 결과도 뒤따랐다. 지도교수가 학생들의 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학생들의 봄여름 야외활동에 매번 따라다니면서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삭막한 강의실을 떠나 사제 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3학년 학생들의 거제도 졸업여행에 따라간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몽돌해변에서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우리는 깡 소주에 모두 취해 있었다. 남학생은 여학생을 들어다 바다에 집어넣기도 하고, 남아도는 불타는 젊은 에너지로 군무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나도 오랜만에 흥이 나서 차디찬 이성을 잃고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잔치가 파하면서 나는 몸을 가르기 힘든 상태에서 우리 학생들 모두를 하나씩 끌어안고 볼에 깊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미투(me too)가 성행하는 지금이었다면 나는 아마 일찍 교수생활을 접었어야 했으리라. 참으로 인생에 다시 오기 힘든 행복한 밤이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 간지 5년 뒤의 일이었다. 대학에 자유화 바람이 불면서 일부 학과에서 자기학과 교수들을 배척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무능교수, 어용교수라는 이유에서였다. 학생들은 교수 아파트에 몰려가서 무능교수라고 소리쳤다. 최악의 경우는 교수가 시내버스를 탔을 때 손가락질을 하면서 악질교수 물러가라고 외친 일이었다. 교수들은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제발 자기 학과만은 이런 미친 불길이 번지지 않기만을 조용히 기도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 교수인 내가 볼 때 일부 책임은 교수에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았다. 자기 제자들에게 함부로 말을 했다. 일부 교수들은 연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실력이 형편없이 모자랐다. 편안한 환경에서 너무 오래 타성에 젖어 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공산당이나 하는 인민재판식으로 교수를 몰아내도 되나, 나는 회의가 들었다. 대학 당국은 어떤 조치도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교수는 성난 학생들에게 적금 붓는 것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비굴하게 애걸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정말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돌변한 시대라고 해도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이렇게 망가질 순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학장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대자보를 섰다. 학생 같지 않은 학생들을 모두 퇴학시키고 우리 교수들도 본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임을 통감하고 모두 물러나자는 요지였다. 이 대학 역사상 교수가 대자보를 써서 광장에 붙인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자보 때문에 학교가 난리가 났다. 학장이 불렀다.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조용히 조금만 더 있으면 난리가 해결될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교수가 왜 나서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다음 날 문제된 학과의 학생들이 연구실을 기습했다. 대부분 제대한 학생들로 눈에 붉은 살기가 돌았다. 왜 아무 것도 모르는 교수가 다른 학과 일에 참견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우리 과 교수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 제대로 알고 옹호하느냐고 윽박질렀다. 나는 총칼을 들지 않은 학생들도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온몸에 전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우리 과 학생회가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일부 학생들은 나를 비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학생들이,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대학에서 모든 교수들이 묵비권을 행사하는데 반해, 우리 교수님은 대자보를 통해 자기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지 않았는가, 이것은 오히려 용기 있는 철학자다운 행위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옹호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정년 때까지 대학에 붙어 있게 되었다. 우리 제자들이 이렇게 똑똑했나,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대자보로 유명세를 탄 여세를 몰아 나는 학교 신문에 기고했다. “본래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가? 여러 다양한 제도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서로 완전해지기 위해서이다. 비록 수업이라는 딱딱한 형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대화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기능을 연마하고 그리하여 결국 완전해지고자 한다. 완전한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 때는 아직도 꿈꾸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진리에 도달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되돌아보면 나는 실패한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