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4. 장자)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4. 장자)
장자는 노자의 자연과 도의 개념을 이어받았다. 그는 『장자』라는 책을 섰다. 장자 자연론의 핵심 개념은 천(天)과 도(道)와 자연이다. 이들이 함의(涵義)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히 긋기가 쉽지 않다. ?장자?에 나오는 ‘천’자는 크게 천공(天空)ㆍ천지(天地)ㆍ천연(天然)의 의미로 쓰인다. 천공의 천은 창공(蒼空)처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천지의 천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며, 천연의 천은 자연과 동의어이다. 이 중에서 천지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며, 일체 만물은 그 속에 포괄된다. 이 광대하며 일체를 포괄하고 있는 천지를 성립․유지․전개시키는 것이 ‘도(道)’이다. “대저 도에는 정력이 있고 신용이 있으나 행위가 없고 형상이 없다. 그래서 마음으로 전할 수는 있으나 손으로 받을 수는 없으며, 체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스스로 돌봄이 있고, 스스로 뿌리를 뻗어 천지가 생겨나기 이전의 옛날부터 굳건히 존해해 있어서, 귀신을 신령스럽게 하고 상제를 신령스럽게 하여, 하늘을 만들어 내고 땅을 만들어 낸다. 태극 위에 있어도 높다고 여기지 않고, 육극 아래 있어도 깊다고 여기지 않는다. 천지보다 앞서 존재해도 오래다고 여기지 않고 태고 이전부터 존재해도 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大宗師> 夫道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在太極之先 而不爲高 在六極之下 而下爲深 先天地生而不爲久長 於上古而不爲老) 이러한 도를 장자는 물물자(物物者), 형형자(形形者), 생생자(生生者) 등의 말로 표현하였다. 물물자는 천지 만물로 하여금 천지 만물이 되게끔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형형자는 형체 있는 것들로 하여금 형체를 지니게 하는 것을 뜻하고, 생생자는 생명 있는 것들로 하여금 생명을 가지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도가 모든 존재자들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 실체임을 뜻한다.
이로써 보면 도는 모든 존재와 힘의 근거이다. 천지 만물이 존재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도가 그 근거로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도가 존재하고 움직이기 위하여 그 이외의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는 ‘자본자근(自本自根)’한다고 표현된다. 자본자근하는 도는 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를 무대(無待)라고 한다. 이 점에서 도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과 뚜렷이 구별된다. 현상계의 온갖 사물과 사건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들은 피(彼)와 차(此)가 대대(對待)하니 서로 대립하면서 동시에 의존한 채 존재한다. 피는 차를 불러일으키며, 차는 피를 불러일으킨다. 피 없이 차가 있을 수 없고, 차 없이 피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도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천지 만물의 본체인 도는 피도 아니고 차도 아니며, 시(是)와 비(非), 생(生)과 사(死)를 초절(超絶)하여 있다. 그래서 장자는 도를 도추(道樞)라고 한다. “피(彼)와 시(是)가 그 짝을 얻을 수 없으니 그것을 도추(道樞)라고 한다.”(<齊物論>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이는 도가 절대자임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도를 장자는 ‘독(獨)’이라고도 표현하였다.
이런 도는 천지 만물 어디에나 통한다. “천지에 통하는 것은 덕이며 만물에 유행(流行)하는 것은 도이다.”(<天地> 故通於天地者 德也 行於萬物者 道也) 천지 만물에 두루 통할 수 있는 도는 또한 천지 만물 모두를 포함한다. 장자는 동곽자(東郭子)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도의 존재를 자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이른바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장자는 ‘없는 곳이 없소’라고 했다. 동곽자는 또 ‘어디에 있는지 지시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자 장자는 ‘청개구리나 개미에게도 있소’ 하였다. 이에 동곽자는 ‘어찌 그리 하등한 것들에만 있소’ 하자 장자는 ‘기장이나 피에게도 있소’ 하였다. 동곽자는 ‘어째서 더 하등의 것으로 내려가오’ 하므로 장자는 ‘기왓장이나 벽돌에도 있소’ 하였다. 그래서 동곽자는 다시 ‘어째서 더욱 더 하등의 것으로 내려가오’ 하므로 장자는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하였다.”(<知北遊> 東郭子問於莊子曰 所謂道惡乎在 莊子曰 無所不在 東郭子曰 期而後可 莊子曰 在螻蟻 曰 何其下邪 曰 在稊稗 曰 何其愈下邪 曰 在瓦甓 曰 何其愈甚邪 曰 在屎溺) 또한 도는 그 짝이나 대상이 없는 절대(絶對)의 존재이므로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감각ㆍ사려ㆍ감정 등이 없다. 즉 도는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지 않으며, 사유하거나 욕구하지 않으며,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아울러 도는 무엇에 대하여 말하지도 않고, 어떤 것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도는 무위(無爲)하다. 도는 무위일 뿐만 아니라 자연(自然)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을 뜻한다. 이는 도가 사물과 달리 그 이외의 어떤 존재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의 반대어는 ‘사연(使然)’이다. 사연은 시켜서 그러한 것이다. 자연이 주동적ㆍ능동적이라면, 사연은 피동적ㆍ수동적이다. 도는 절대이며 유일하며 전체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시키는 어떤 존재가 있을 수 없다. 도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하여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존재를 성립시키며 저절로 움직인다.
이런 도(자연)은 하나의 자연물과는 다르다. 자연물은 인간의 감각기관에 잡히지만 자연 그 자체는 포착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감각 기관은 자연의 참모습을 아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남해의 제왕은 숙(儵)이라 부르고 북해의 제왕은 홀(忽)이라 부르며, 중앙의 제왕은 혼돈(渾沌)이라 부른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나라에서 만나니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이 혼돈에게 진 신세를 갚고자 상의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며 들으며 숨 쉬는데, 유독 혼돈만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시험 삼아 그에게 뚫어 주자!’ 이리하여 하루에 한 구멍씩 뚫으니 이레째 되는 날 일곱 구멍이 모두 뚫렸으나, 혼돈은 도리어 죽고 말았다.”(<應帝王>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混沌 儵與忽時相與遇於混沌之地 混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混沌之德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混沌死) 여기에 나오는 혼돈은 자연을 비유한 것이며, 일곱 구멍은 귀ㆍ눈ㆍ코ㆍ입 등 감각 기관을 가리킨다. 만약 자연을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려면 그 자연은 시각ㆍ청각 등에 나타나는 감각 자료들로 분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할된 자연은 그 생명력을 잃고 왜곡되고 말 것이다.
장자는 자연(도)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육신의 구속을 초탈하여 대자연의 질서에 따라 행동하며, 죽음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초연히 세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또 그런 사람은 현실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천공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대붕(大鵬)과도 같은 자유인(自由人)이다. 장자는 이런 인물을 ‘성인(聖人)', ‘지인(至人)’, ‘신인(神人)’, ‘진인(眞人)’ 등으로 부른다. “도의 근본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사람을 천인이라 하고, 도의 정수로부터 떠나지 않는 사람을 신인이라 하고, 도의 순진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사람을 지인이라 한다.”(<天下> 不離於宗 謂之天人 不離於精 謂之神人 不離於眞 謂之至人) 이런 인간은 명예를 따지지 않으며(無名), 공로를 따지지 않으며(無功), 자기가 없는(無己) 존재이다. “무릇 천지의 정도를 타고 육기를 제어하여 무궁에 노니는 자가 또한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그러므로 지인은 무기요, 신인은 무공이며, 성인은 무명이다.”(<逍遙遊> 若乎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장자는 자연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이를 ‘법자연(法自然)’ 또는 ‘순자연(順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에 따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선입견 등 일체 사의(私意)를 배제함을 의미한다. 이를 장자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되 사의를 개재시키지 않음(順物自然而無客私焉)”이라고 하였다. “너는 너의 마음을 담백하게 하고, 너의 기를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여, 자연의 물상 변화에 순응하되,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應帝王> 汝遊心於淡 合氣於漠 順物自然 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 자연에 따르려면 사물을 그의 본성에 맞게 대해야 한다. 개인의 마음((私心)은 사람과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마음을 표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타인을 해칠 수 있다. “옛날에 어떤 바닷새가 노나라 교외에 날아왔다. 노나라 임금이 그 새를 맞아 묘당 위에서 연회를 열어 구소를 연주하고 태뢰의 성찬을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러나 그 바닷새는 도리어 눈이 어지럽고 마음이 슬퍼서, 고기 한 점 먹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고 한다면, 그 새가 깊은 숲 속에 깃들여 살고 광활한 대지에서 노닐며 강과 호수에서 헤엄치면서 미꾸라지와 피라미를 먹고 새떼의 행렬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야 한다. (---)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지만 사람은 물속에서 살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 생활 방식이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도 본래 같지 않다. 그러므로 옛 성인은 그들의 기능을 획일화하지 않고, 그들의 일을 같지 않게 한 것이다.”(<至樂>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食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 浮之江湖 食之鰌鯈 隨行列而止 委蛇而處 (---) 魚處水而生 人處水而死 彼必相與異 其好惡故異也 故先聖不一基能 不同其事)
장자는 노나라 임금이 새를 이와 같이 대접하는 것을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以己養養鳥)’이라고 하였다. 이는 오히려 새를 죽이게 된다. 새를 살리려면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길러야 한다(以鳥養養鳥). 이것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행위 한 경우 야기될 수 있는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새를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기르려고 들면 새의 생명을 해칠 수 있듯이, 만약 어떤 통치자가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도리어 백성의 성정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백성의 성정을 해치지 않고 그들이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그 사물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색안경을 쓴 것처럼 자기 위주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며 처리한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잠자면 허리에 병을 얻어 몸이 마비되어 죽는다. 그러나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에 올라가면 몸이 떨리며 두려우니 원숭이도 그러한가? 이 세 가지 거처 중에 어느 것이 바른 거처인 줄 누가 알겠는가? 사람은 소와 돼지를 먹고, 순록과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솔개나 가마우지는 쥐를 즐긴다. 이 넷 중에 어느 것이 바른 맛인 줄을 누가 알겠는가?”(<齊物論> 民濕寢 則腰疾偏死 鰌然乎哉 木處 則惴慄恂懼 猨猴然乎哉 三者孰知 正處 民食芻豢 穈鹿食薦 螂蛆甘帶 鴟鴉耆鼠 四者孰知正味) 이로써 보면 사람과 물고기와 새와 사슴은 각기 보는 시각이 같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가치를 평가하거나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자기 위주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물관지(以物觀之)’라 하고, 사물 자체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도관지(以道觀之)’라 할 수 있다. 도는 온갖 사물과 사건의 전체적이며 근원적 원리이므로, 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나와 남, 시와 비, 귀한 것과 천한 것 등의 나눔이 없어진다. 그러나 물(物)은 부분적이며 국한된 개별자이기 때문에 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천지 만물이 갖가지로 분해될 수 있다. “도를 통해서 사물을 보면 사물 사이에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없으나, 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자기를 귀하다고 하고 상대방을 천하다고 한다.”(<秋水> 以道觀之 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이와 같이 이물관지의 입장을 취하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이익 위주로 사물을 보기 쉽다. 그래서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길게 이어 주거나, 두루미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 주면 그들을 해치게 된다. 물오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다리는 짧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하며, 두루미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다리는 그보다 짧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편적인 자기의 세계관에 이끌릴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파괴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사물을 봄으로써 물오리와 두루미를 해칠 수 있듯이, 오늘날 인류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대처함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 부존자원을 고갈시키며 흙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장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려면 사물을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려면 결국 도의 관점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도는 일체 사물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저것으로부터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는 것만 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 때문에 생겨나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겨난다. 곧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으로 생겨난다는 설명이다. 생(生)에 대립하여 사(死)가 있고, 사에 대립하여 생이 있으며, 가(可)에 대립하여 불가(不可)가 있고, 불가에 대립하여 가가 있으며, 시(是)에 기인하여 비(非)가 있고 비에 기인하여 시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런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천(天)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것이야말로 시(是)에 기인하는 것이다”(<齊物論>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 亦因是也)
이와 같이 이물관지의 입장에서 볼 경우는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피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피가 된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피이면서 차이고, 차도 차이면서 피이다. “피는 피이고 차는 차이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물을 고착시켜 일면적으로 보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지 않고 전면적으로 보려면 천(天), 즉 도의 관점에 서야 한다. 장자는 사물을 전면적으로 보는 것을 ‘도추(道樞)의 관점’이라고 하였다. 도추는 일체 사물과 사건의 중추(中樞)이니, 그러한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사물이 아무리 무궁하게 변할지라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가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에 반대하고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를 것’을 논하면서 “그들의 기능을 획일화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을 같지 않도록 한다(不一其能 不同其事)”는 주장 속에는 조화를 중시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다양한 사물 또는 주장이 상반상성(相反相成)하여 조화를 이루게 되면 사물들은 각기 자기들의 성능을 발휘하여 생성,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동(同)은 어느 하나의 사물이나 주장이 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는데, 만일 어느 하나가 획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다른 사물의 발전을 저해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일체의 사물이나 사건들을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대처하기를 주장하는 장자의 사상은, 다양성을 조화롭게 살려 낼 수 있는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천지 만물의 근원은 ‘도(道)’이고 사람의 근원은 ‘덕(德)’이다. 덕은 어떤 개체에 전개되어 내재한 도이기 때문에 본성에 있어서 도와 동일하다. 그런데 사람의 성품은 물질세계 속에서 육신과 물질의 영향을 받아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구정물에 물들어 있다. 그러한 성품을 밝혀 본연의 성품을 되찾는 것이 ‘성수반덕(性脩反德)’이다. 인간의 심성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을 남김없이 제거한다면 덕성의 순수한 빛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 빛은 일절의 근원(根源)을 비출 수 있다. 이것을 장자는 ‘조철견독(朝徹見獨)’이라고 하였다. ‘조철’은 수도하는 사람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환히 뚫리는 것이며, ‘견독’은 독자적 실체인 도를 보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정(虛靜)한 심(心)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아의 본성인 덕과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인간은 도와 통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도를 무시하고, 외물(外物)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외물을 중시할수록 사람들은 타인과 경쟁하게 되고, 마음은 더욱 날카롭고 교묘해진다. 그리고 갈수록 편리한 것만 추구하게 된다. “자공(子貢)이 남으로 초(楚)나라에 갔다가 진(晉)나라로 돌아올 때 한수(漢水)의 남쪽을 지나면서 마침 채소밭에서 일하고 있는 어떤 노인을 만났다. 웅덩이 쪽으로 길을 파서 그 속에 들어가 항아라에 물을 퍼서 채소밭에 주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많이 들이되 효과는 적어 보였다.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 이랑을 적시더라도 힘은 매우 적게 들고 효과는 많으니 노인장께선 이를 바라지 않습니까?’ 채소밭을 가꾸는 노인이 고개를 들어 말하였다. ‘뭐라고?’ 자공이 말하였다. ‘나무를 뚫어 기계를 만들되 뒤쪽은 무겁고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을 마치 긷듯이 달아 올려서 빠르게 풀 수 있으니 그 이름을 용두레하고 합니다.’ 채소밭 가꾸는 노인이 성난 표정을 짓다가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우리 스승에게 들으니 기계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기사(機事)가 있게 되고, 기사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기심(機心)이 있게 된다오. 기심이 가슴 속에 있으면 순결하고 청백한 마음이 갖추어지지 않고, 순결하고 청백한 마음이 없으면 정신이 안정되지 않으며, 정신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道)가 깃들이지 않을 것이라 하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끄러워 그것을 쓰지 않소.’“(<天地> 子貢南遊於楚 反於晉 過漢陰 見一丈人 方將爲圃畦 鑿隊而入井 抱甕而出灌 搰搰然 用力甚多 而見功寡 子貢曰 有械於此 一日瀆百畦 用力甚多而見功多 夫子不欲乎 爲圃者卬而視之 曰 奈何 曰 鑿木爲機 後重前輕 挈水若抽 數如佚湯 其名爲槹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自不備 純自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여기서 기사와 기심의 기(機) 는 모두 투기취교(投機取巧)를 뜻한다. 즉 기회를 틈타 교묘하게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은 불행해지고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장자의 가르침은 현대 기계문명에서 병든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나아가 기계 문명이 가져온 환경 문제를 재고해 봐야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래서 장자는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를 찾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도는 자기의 내면에서 찾아야(內求) 한다. 자기 바깥 세계에서 찾으면(外求) 도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심재(心齋), 전심일지(專心一志), 좌망(坐忘)이 필요하다. 심재는 제사를 앞둔 사람이 며칠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육신의 재계(齋戒)를 하듯 마음의 재계를 뜻한다. 이런 심재를 통해 마음속에서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물든 성향을 씻어버리면 마음이 텅 비게 되고, 마음이 텅 비게 되면 허령(虛靈)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나와 대상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고 나와 물을 모두 잊어버리는 물아양망(物我兩忘)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전심일지는 심지(心志)를 전일하게 하는 수양 공부로서 분산된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는 방법이다. 사람은 현상계 속에 살면서 사려 분별하는 가운데 의식이 분산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의식으로는 도에 이를 수가 없다. 그것을 장자는 매미 잡는 노인의 예로 설명하고 있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에 숲을 지나다가 등이 구부러진 노인이 댓가지로 매미를 잡는데 마치 손으로 물건 집듯이 손쉽게 잡는 모습을 보았다. 공자가 그 노인에게 ‘당신은 정말 훌륭한 재주를 가지셨군요! 매미를 잡는 데도 비결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다네. 5, 6개월쯤 훈련하여, 장대 끝에 구슬을 두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 장대로 매미를 잡더라도 놓치는 일이 드물지. 장대 끝에 구슬을 세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어떻게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 장대로 매미를 잡더라도 실수할 경우는 열 번에 한 번밖에 되지 않네. 장대 끝에 구슬을 다섯 개 포개 놓고 장대를 아무렇게나 움직여도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매미를 잡는 것이 마치 물건을 줍는 것처럼 쉽게 된다네. 마치 그루터기처럼 몸을 오므린 채 꼼짝 않고,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조용히, 장대를 들고 있는 팔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네. 천지의 광대함도, 만물의 다양함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매미의 날개만이 눈에 들어온다네. 나는, 뒤를 돌아다보거나 곁눈질 따위를 하지 않고, 이 세상 어떠한 사물에 의해서도 매미 날개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는다네. 이러하니, 어찌 매미를 놓치는 일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그 기(技)가 거의 신기(神技)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저 영감님을 두고 한 말이다.’”(<達生> 仲尼適楚 出於林中 見痀僂者承蜩 猶掇之也 仲尼曰 子巧乎 有道邪 曰 我有道也 五六月 累丸二而不墜 則失者鏁銖 累三而不墜 則失者十一 累五而不墜 則猶掇之也 吾處身也 若厥株狗 吾執臂也 若槁木之技 雖天地之大 萬物之多 而唯蜩翼之知 吾不反不側 不以萬物易蜩之翼 何爲而不得 孔子顧謂弟子曰 用志不分 乃凝於神 其痀僂丈人之謂乎) 이 인용 속에는 공자가 거론되었지만,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수(守)의 공부이다.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전일 공부가, 심지를 쓰되 나누지 않는 용지불분(用志不分)의 경지를 닦기 위한 것이라면, 외물의 자극에 의하여 동요하지 않게 본성을 함양하는 방법이 수의 공부이다. 이것을 장자는 ‘하나를 지킴(守其一)’, ‘근본을 지킴(守其本)’, ‘오직 신을 지킴(唯神是守)’, ‘그 으뜸을 지킴(守其宗)’, ‘삼가 진을 지킴(愼守其眞)’, ‘순수한 기를 지킴(純氣之守)’ 등의 말로 표현하였다.
좌망은 정좌한 상태에서 자아, 사회, 자연 등 일체의 현상을 잊어버리는 정신의 경지이다. “안회가 스승인 공자에게 말했다. ‘요즘 약간의 진척을 보았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인의(仁義)의 행위에 힘쓰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이를 평하여 말했다. ‘됐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 후 어느 날,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그 후 저는 약간의 진척을 보였습니다.’ 이 말에 공자가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이냐?’라고 묻자, 안회는 ‘세속의 관습을 좇아 예를 지켜 사람과 사귀거나, 음악을 즐기며 사람과 화합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를 평하여 이렇게 말했다. ‘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충분한 것은 아니다.’ 다시 그 후 어느 날, 안회는 또 공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전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공자가 물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좌망(坐忘)에 들게 되었습니다.’라고 안회가 대답했다. 공자는 안회의 말에 깜짝 놀라, 태도를 바르게 하고 물었다. ‘좌망? 그것이 무엇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살아있는 몸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총명한 이목(耳目)의 활동을 없애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몸으로부터 떠나고, 존재의 징후인 지혜로부터 떠나, 오직 자연의 큰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감탄하여 말했다. ‘큰 도와 하나가 되었다면, 굳이 그것을 좋다 나쁘다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자연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이제 너를 이야기함에, 이 세상의 언어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말 따위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부터 나는 너의 뒤를 따르며 네게서 가르침을 받고 싶다.’(<大宗師> 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它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忘禮樂矣 曰 可矣 猶未也 它日復見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枝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仲尼曰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장자는 인의예악(仁義禮樂)과 같은 도덕관념도 자기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 것들을 잊는 것은 망외(忘外) 혹은 망물(忘物)이다. 더 나아가 도덕관념을 발생케 하는 주체인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망내(忘內) 혹은 망기(忘己)이다. 여기서 안회가 말하는 망기는 인간의 형체인 육신을 잊는 것이고, 총명이라는 마음을 잊는 것이다. 나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도와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좌망이다. 좌망의 경지에 도달할 때 마음은 아무 장애 없이 활짝 열려져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다. 그러면 육체적인 자아나 지략에 묶여 있는 자아로부터 끌어올려지며, 개체적인 소아(小我)부터 드넓은 외계 속에서 우주적 대아(大我)와 합일하게 된다. 장자가 말하는 대통(大通)의 경지에 도달하여 대도(大道)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만물과 화해롭게 통하여 편애가 없어지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참여하여 편견이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대통의 경지이다.
장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에 속박당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제어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물을 물로써 부리고 물에게 사역당하지 않는다(物物而不物於物)’는 인생관을 제시하였다. “어느 때는 올라가고, 어느 때는 내려오며, 화합하는 것으로써 도량을 삼는다.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에 소요케 하여, 물을 물로써 부리고 물에게 자신을 사역당하지 않으면, 어찌 물에게 화를 당하겠는가?”(<山木> 一上一下 以和爲量 浮遊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則胡可得而累邪)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은 일체 사물과 사건을 주재하되 그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음을 뜻한다. 우리가 천지 만물을 존재케 하고 움직이게 하는 도와 하나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어떤 사물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 자재할 수 있다. 이 경지를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