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에 관한 좋은 문장들
성탄제
이효범
2021. 4. 3. 18:12
어두은 방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초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 성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