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경전의 첫 구절에 대하여)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경전의 첫 구절에 대하여)
구녕 이효범
오래 만에 편지를 씁니다. 모두 잘 지내고 계시죠.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세상은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기록을 깨는 강추위로 나라는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병자처럼 국가도 지구도 마비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와의 오랜 싸움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쳐 있습니다.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정도로 증오만 가득 차고 여유와 유머가 사라졌습니다. 혹시 이것이 末世의 징조가 아닌가, 다가오는 미래가 불안하기만 합니다. 일상이 깨지면서 경제적 활동도 마비되고 있습니다. 많은 동네 음식점들이 문을 닫았고 가난한 소상공인들이 더욱 가난에 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불안할 때는 더더욱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도 코로나 때문에 본질적인 종교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에게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은 마치 대통령에게 통치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통해 확산되는 코로나 때문에, 마치 목회자들을 술집 마담처럼 죄인 취급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종교에게도 해당됩니다. 또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아가야 하는 교회를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음식점에 손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헌금이 없는 교회는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 또한 모든 종교에 똑같이 적용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정부와 언론은 방역에 협조하라고만 윽박지르지 말고 이들의 힘든 형편을 도와줄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남들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나 기관의 장 그리고 고급 공무원 같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욱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 곁에 내려가서 아픔을 같이 느끼고, 한 풀이 같은 그들의 하소연을 오래 가만히 들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얼굴을 붉히며 자기들 이익만 소리치지 말고, 그리고 단지 말로만 지시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고통 받는 현장에서 같이 땀 흘려야 합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아직도 장관 결재를 수행하고 있다면, 장관실에만 편히 앉아 있지 말고, 전국의 구치소를 찾아다니면서 소독약을 뿌리고, 또 구치소에서 죽은 자의 집안에 찾아가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사과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여당이나 야당의 고위 당직자들도 종교 시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어떻게 하면 종교가 본연의 업무를 회복할 수 있을가를 모색해야 합니다. 국민의 영혼을 책임져야 할 종교가 지금 너무 죽어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내야 합니다. 종교가 살아나야 국민이 힘을 얻고 그 힘으로 불안을 털어내고 코로나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한국은 종교 백화점처럼 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티토가 죽은 후의 유고슬라비아처럼, 불안하게 동거한 종교들이 한 순간에 적으로 바뀌어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그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인 비빔밥적인 정신 때문에 그런 妙合을 이루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갖가지 요소의 맛을 버리지 않고 살리면서도 큰 하나의 맛을 내는 비빔밥은 우리 문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의 이념과 원리를 담고 있는 경전이 있습니다. 하나의 경전에는 다양한 내용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종교들의 경전의 첫 구절들을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그 차이에 놀라게 됩니다.
(1) 불교의 경전은 모두 ‘如是我聞’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입니다. 붓다가 말한 대로 제자 아난다에게 들려진 것을 아난다가 그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 경전은 붓다의 열반 후 대가섭이 주도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부처의 사촌이자 多聞제일 제자인 아난다(아난, Ananda)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시작하여 다섯 니까야(nikaya, 팔리 경전)를 암송하였고, 당시에 모인 500명의 참가자가 함께 외워 전했습니다. 따라서 여시아문은 아난다가 듣고 붓다가 말한 것을 증명하는 표현으로, 불교경전의 첫머리를 장식하였습니다.
(2) 유교의 핵심 경전은 四書三經입니다. 그 중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가리킵니다. 『논어』 <학이편> 제1장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穩 不亦君子乎(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베우고 때로 배운 것을 익히면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역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역시 군자답지 아니한가.)”입니다. 『맹자』 는 맹자가 양 나라 혜왕과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王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맹자가 양 혜왕을 만나 보았는데, 왕이 말하기를 ‘노인께서 천리를 멀다않고 오셨으니, 역시 이 나라에 이익을 주심이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하기를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대학』은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대인이 되는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으며, 백성을 친함(새롭게 함)에 있으며, 이 두 가지가 지극한 선에 머무르도록 함에 있다)”로 시작합니다. 『중용』은 천명으로 시작합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見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본성이라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일러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일러 교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지 않을 때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듣지 않을 때도 두려워한다. 숨은 것보다 더 잘 들어남이 없고, 미세한 일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나만이 아는 마음의 움직임을 조심한다.”
(3) 도교는 노장의 도가사상을 흡수하여 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노자의 『道德經』 제1장은 이해하기가 참으로 난해합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 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장자가 저술한 『莊子』는 寓言으로 되어 있고, 그의 말은 광대무변하면서 자유 분망합니다. 첫 편 <逍遙遊>부터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鵬이라 하며 이 붕의 등 너비도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모른다. 이 새가 한 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天地를 말한다.”
(4) 기독교의 경전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낯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신약에는 4복음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비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엘리웃은 엘리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시작하고,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께 헌정함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요한복음>은 앞의 세 共觀 복음서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신성을 담대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 구한말은 우리나라 전 역사에 걸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위정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주자학의 폐쇄된 세계에 안주하여,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했고 국외적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결국 민족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겼습니다. 이 때 우리 민족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신적인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시도가 바로 신종교라고 하는 민족 종교운동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西敎에 대항하여 東學을 창도하였습니다. 『東經大全』은 최제우가 한문으로 쓴 동학의 경전입니다. 이 경전은 한국 근대 신종교의 최초 경전으로 유,불,선과 민간신앙의 요소가 통일적으로 결합되었고, 그 후 여러 신종교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이 경전의 처음에 <布德文>이 나옵니다.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盖自上古以來 春秋迭代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修其德 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되,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니, 오제 후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
(6)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이슬람교가 들어와 활발한 포교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경전은 코란(Qur’an, 꾸란, Koran)입니다. 코란은 ‘읽는 것’ 곧 독경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함마드에 의해 외워져 추종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개경장’으로 이름지어진 제1장은 신에게 바치는 경건한 짧은 기도의 말이며, 종교 의례 때 항상 암송됩니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그분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비노니,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는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우리 땅에서 중요하게 활동하는 이런 종교 경전들의 서두를 보면 그 모습이 너무나 달라 언뜻 보면 서로 공존하기가 어려울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 가는 등산로가 여러 개가 나있고, 가는 도중 풍광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정상은 결국 하나이고, 사실 표피는 몰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본질을 나는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지 말고 연대하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의 영웅처럼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정원이 하나의 꽃들로 채워지는 것도 좋지만, 각기 다른 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꽃밭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 풍토는 싫든 좋든 다양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화합하여 더 큰 公共의 善을 이루고, 그것이 이 고난의 시대에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