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42, 슬픔은 아니다)
o 슬픔은 아니다
구녕 이효범
개는 개의 길을 따라 개로 가고
사람은 사람의 길을 따라 사람으로 오듯이
슬픔과 기쁨이 다니는 길은 항상 따로 있다.
병원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산길로 난 구부러진 길을 찾아 올라가라.
병원 옆에는 당당하게 경찰서도 서있다.
밤새 큰 도둑이 들어왔다 나갔어도 신고하지 말고
산길이 끝나는 낡은 수도원에 가서 오래 기도하라.
모과처럼 못생긴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
나를 위해 쌓았던 높은 성곽도 무너지리라.
아침에 일어나서 황금빛 똥을 싸고
든든하게 밥을 먹어라.
배가 차야 눈이 밝아진다.
남의 비난은 지나가는 바람이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라.
파고 또 파야 물이 나오듯이
오래 두면 주식도 복리로 불어나듯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믿고 작은 노력에 투자하라.
한탕 잡으려고 움켜쥘 때 슬픔이 끼어든다.
그 슬픔으로 약을 먹을 때 더 큰 슬픔이 나타난다.
세상에는 자신을 잃는 것 말고는 슬퍼할 일이 없다.
자연이 선물로 어렵게 주신 인생
버리고 또 버리고 생각까지 버리면
똬리 튼 슬픔은 소리 소문 없이 떠나간다.
아니, 슬픔마저 죽도록 슬퍼하면
슬픈 슬픔은 기쁜 기쁨이 된다.
후기: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나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주로 다니는 길로만 다닙니다. 38년을 집에서 근무지인 대학교까지 고정된 길로만 다녔습니다. 아파트가 있고, 상가가 있고, 산이 있고, 터널이 있고, 강이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무심하게 흐르고, 강가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이는 자연적인 길 이외에도 마음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길도 거의 습관처럼 고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에 물이 반쯤 남았는데 언제나 ‘이제 반밖에 안 남았네’ 라고 불안해하고, 다른 사람은 늘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라고 여유롭게 말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여행할 때 몸담았던 일상이 다시 보이는 것처럼, 평소에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세계도 한번은 뒤집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히 뒤집어 놓고 보면 비로소 버려야 할 쓰레기가 보입니다. 슬픔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 속에 오래 빠져 있으면 생명의 환희가 사라지는 고약한 쓰레기입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슬픔이 도둑처럼 찾아오지 못하도록 길목을 잘 막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