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우리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1(과거에 대한 반성))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우리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1(과거에 대한 반성))
구녕 이효범
가을이 되었습니다. 햇살은 따사하고 오곡백과가 익는 아름다운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쁘지 않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물론 나이가 든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의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앞으로 4~5회에 걸쳐 우리 사회를 위한 에세이를 써볼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입니다.
o 우리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1 (과거에 대한 반성)
구녕 이효범
(1)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더더욱 그렇다. 이런 자연적이고 문명적인 거대한 도전 앞에서 우리는 생존하고 계속 발전할 수 있을까? 아니면 광복 이후 남한에서 75년간 이룩한, 단군 이래 최대의 민족적 번영이 이제 끝나는 것은 아닐까?
미래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약자에게는 不可能이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無知지만, 지혜 있고 대담한 자에게는 機會이다. 임길진 교수의 의하면 미래를 대하는 3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좇아가기’ 방법이다. 고난이 극심할 때는 절망하거나 도피하거나 영합하는 회피적인 적응방법을 취한다. 매일매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위기 상황을 강조하면서 뒤늦게 단기적 대응책을 찾아, 對症的으로 위기를 관리한다. 다른 하나는 ‘맞춰가기’ 방법이다. 과거와 현재의 추세를 연장하여 미래를 추정해보고, 이에 비추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시도한다. 1960년 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적 경제계획 하에 경제 발전을 추진했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발군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계획 방법은 과거를 통해 누적된 현재의 구속적 조건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회피하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沒價値的이기 때문에 기존현상(status quo)을 암암리에 옹호하고, 제도의 획기적 개혁이나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래 만들기’ 방법이다. 이 방법은 과거와 현재의 추세를 연장하여 미래를 예측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엄격한 성찰과 비판을 통하여 계획의 기본적 가치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 그렇게 발견된 인간적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의 구속적 조건을 대폭 수정하거나 제거하고, 과감한 제도적 개조를 통하여 인간의 발전을 꾀하고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이 방법은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
현재 한국은 세계10대 선진국에 속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서방선진국 모임인 G7을 확대개편하려고 계획하면서 우리나라를 초청하려고 하였다.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문화력, 인구자원력, 과학기술력 등을 종합한 우리나라의 국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에 이은 8위 정도이다. 이런 발전이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조선말 일제에게 강제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패배 의식에 젖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당당한 세계인이 되었다. 한국인, 한국 기업, 한국이 만들어낸 제품이나 문화, 나아가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오늘날처럼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의 최빈국으로 발전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평가를 받던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냄으로써 어느덧 세계가 부러워하는 모범 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긍지와 자부심이 흔들리고 있다. 미래에 대한 낙관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실패한 국가가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개인처럼 민족과 국가의 운명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개인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듯, 국가나 민족도 구성원들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서로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따라 전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긴 역사를 보면 태평성대한 시기가 있었고 고난의 시기가 있었다.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다시 한 발짝 도약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현재를 가져온 가까운 원인을 반성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는 일본에게 피동적으로 개항을 강요당했다. 근대화(modernization)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제도가 수립되고 국민 참정권과 효율적인 관료제도가 정착 또는 확대되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하고 국부와 국민소득이 증대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평등주의적 사회체제를 확립하고 사회간접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며, 문화적으로는 과학과 기계를 보급하고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같은 가치관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이런 근대화를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와 접촉하면서 겁박 속에서 강제로 근대화의 흐름에 편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민족의 운명이 태풍 앞에서 꺼지는 극단적인 죽음을 경험하였다. 황제로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목숨을 바쳐 애국을 외쳤지만 모든 노력은 철저히 실패했다.
국가의 지도층이었던 유학자들은 주리파와 주기파로 나누어져,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서양 중세의 보편논쟁처럼, 너무나 사변적인 人物性同異考 論爭에 몰두하였다. 華西 李恒老(1791-1868)나 蘆沙 奇正鎭(1788-1879)같은 주리파들은 理氣合一에 반대해서 理氣決是二物을 주장하였다. 우주의 대원리인 理는 지극히 순수하고, 玉의 결과 같아서 純善하다. 이것은 선악을 겸비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기와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鹿門 任聖周(1711-1788)나 惠岡 崔漢綺(1803-1877)같은 주기파는 기는 不滅하고, 자연의 모든 질서는 기의 集散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巍岩 李東(1677-1727)은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純理의 본연지성의 차원에서 볼 때 인성과 물성은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적 이성의 동일한 가치가 똑같이 인간과 자연 속에 참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기에서 온다. 기가 균등하지 않으니 차이가 오는 것이다. 율곡은 말했다. “물고기나 새의 본성이 동일하다. 사랑이 산골짜기에 넘쳐흐른다.(性同鱗羽 愛止山壑)” 그러나 南塘 韓元震(1682-1727)은 만약에 초목금수도 다 같이 인의예지의 덕을 지니고 있다면 결국 초목금수와 인간이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율곡이 말했듯이 “사물은 모든 덕을 부여받지 않았기(物不能稟全德)” 때문이라고 한다.
(3) 유학자들은 이런 비실용적인 논쟁에 빠져 있다가 외세의 충격을 만났다. 그 중 주리파는 주로 義理之學(social legitimacy)을 강조하는 衛正斥邪派로 변했다. 위정척사파는 吾道(儒學)은 正道이고 외계의 침략 세력은 邪道이다, 人倫인 삼강오륜을 중시하는 왕조 속에서 이것을 부정하는 이질문화는 反국가적이다 라고 의식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禦洋論을 주장하다가, 왜가 침략하자 禦倭論으로 방향을 바꾸고, 국권을 잃은 후에는 義兵抗爭을 전개한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重菴 金平黙(1805-1882), 이항로, 勉菴 崔益鉉(1833-1906) 등이 있다. 안유, 포은, 사육신, 조광조, 이항로의 정신을 이어받은 최익현은 忠義와 義理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면암은 말한다.
“우리의 물건은 限定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이라도 응해 주지 못하게 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유린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前功은 깨어지고 말 것이니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이루게 되는 바의 첫째이옵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 적들의 욕심은 物貨를 교역하는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거개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스러운 노리개이고 手工生産品이어서 그 양이 무궁한 데 반하여 우리의 물화는 거개가 백성들의 생명에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으로 한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 무한한 저들의 사치하고 기괴한 노리개 따위의 물화와 교역을 한다면 우리의 심성과 풍속이 敗退될 뿐만 아니라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이니 그렇게 될 때 東土 수천리는 불과 몇 년 안 가 땅과 집이 모두 荒敗하여 다시 보존하게 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나라 또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둘째이옵니다.
저들이 비록 倭人이라고 하나 실은 洋賊 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邪學의 서적과 天主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간의 傳授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포도청에서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한번 그대로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들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셋째이옵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육지로 내려와 서로 왕래하고 혹은 境內에다가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거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고 겁취하는 등의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사태가 될 경우 도대체 누가 능히 그것을 막겠사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烈婦나 효자들은 애통하여 하늘에 호소하며 원수 갚아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들은 강화를 깨뜨리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그 호소를 들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너무도 많아 온종일 말하여도 다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즉 사람의 도리는 말끔히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고 백성들은 하루도 평안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넷째이옵니다.“
면암의 주장은, 서구의 기독교 열강으로부터 중동의 이슬람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오사마 빈 라덴과 흡사하다. 2002년 11월 24일 영국 일간지 옵서버(The Observer)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사상이 실려 있다. "당신네들은 우리 석유를 헐값으로 탈취하고 있다. 당신네들의 무력과 협박으로 이루어지는 이 불공평한 거래는 세계사상 가장 큰 도둑질 중 하나이다. (---) 우리 종교인 이슬람은 (---) 자비와 정의와 성실함과 염치와 청결과 근엄을 존중한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슬람으로 귀의할 것을 촉구한다. (귀의하지 않는다 해도) 일단 당신네들의 억압과 거짓과 음행 등을 즉각 중지하라. 예의, 원칙, 염치, 청결의 인간이 되어라. 더 이상 邪淫, 동성연애, 마약복용, 도박, 고리대금업 등의 사악에 빠지지 마라.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지금 당신네들의 문명은 인류 사상 최악의 문명이다.“
외세의 항쟁에 집중했던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개화실학파는 우리 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제거하는데 집중했다. 이들은 주로 주기파들이었으며, 實用之學(social efficiency)을 추구했다. 개화파들은 華夷論的 세계관의 극복과 자주적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인간평등사상, 부국강병,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다. 개화파는 1882년 임오군란(개화주의에 대한 수구주의의 반항, 대원군의 민비 세력에 대한 항쟁, 일본세력의 진출에 대한 민족적인 반항) 이후,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 온건파는 改良 洋務 時務 개화파 혹은 東道西器파로 불린다.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이조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청나라 보호아래 청의 양무론적 방법으로 점진적 계량적인 근대화를 지향한다. 양반지배체제와 유교의 틀 안에서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계몽군주체제를 선호한다. 이에 반해 급진 개화파는 일본 메이지유신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유교적 전통의 완전 폐기를 주장한다. 또한 양반지배체제를 타파하고 백성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며, 유교의 틀을 벗어나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한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대치, 윤치호, 서재필, 유길준, 이상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1884년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민중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급격한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했다. 실패의 결과 이수정은 사형 받았고, 윤치호는 반역자의 잔당으로 지목되어 1885년 도미하였으며, 유길준은 1892년까지 연금되었다. 그리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이 얼마나 내정을 개혁하려고 했는가는 정강에 잘 나타나 있다. 대원군의 즉각 송환을 실현하고 청나라에 대한 조공과 허례를 폐지한다.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의 평등권을 이루고, 인재등용에 있어 자리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지조법을 개혁하고 관리의 부정을 막아, 인민들의 곤궁함을 구하고 나라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력에 의하지 않고 일본군에 의지해서 거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정변의 주체들 중 상당수가 훗날 일본의 조선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883-1884년 간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에서 공부한 뒤 갑신정변의 행동대로 활동한 정란교, 이규완, 신응희 등 박영효 계통의 인물들이 식민지시기에 道 장관, 중추원 참의와 같은 높은 벼슬을 역임한 것은 곧 이들의 혁명에 대한 한계를 잘 나타낸다.
갑신정변은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부르주아 개혁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런 변화의 주체 세력들은 나라의 부패했던 내정의 개혁에는 민감했지만, 외국세력의 제국주의적 성격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할 당시에 유럽인은 지구 9%를 지배했다. 그런데 1801년에는 1/3을 지배했고, 1880년에는 2/3로 확대되었다. 1935년에는 무려 지구육지의 85%, 전인구의 70%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자동차를 제조하면서 타이어와 튜브의 원료인 고무수요가 증가하였다. 미국인들은 힘으로 아마존 유역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았다. 아마존 지류 프토마요강 유역에서 1900-1911년 사이에 4000톤의 고무가 산출되었다. 그리고 3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 또한 서구인들이 먹는 마가린을 위해 콩고, 나이지리아, 카메룬, 아프리카 서부 영국식민지의 황금해안들이 장대한 야자농원으로 개간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반노예상태로 전락하였다.
이런 열강의 야욕 앞에서 준비를 못한 국가의 지도자들은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힘을 키울 때까지 문을 걸어 잠그자고 주장하였고, 다른 한쪽은 빨리 열어 우리도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안이었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도 그렇다. 중국도 그렇게 했고 일본도 그렇게 했다. 우리와 중국은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다. 사실 역사의 격변기에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는 이런 두 길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어떤 상태로 문을 여는가이다.
(4) 지도자들이 양분되어 갈팡질팡하면 언제나 민중들은 고달프다. 지수걸 교수는 19세기 우리 민족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기에 일어난 동학 농민 전쟁의 실상을 잘 정리하고 있다. 조선왕조 사회를 지탱해주던 양대 기둥은 봉건적인 신분제도와 지주제도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왕조 사회의 기둥이 뿌리 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변화는 낡은 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가 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였다. 하지만 낡은 사회의 지지자인 봉건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봉건지배 세력은 체제유지를 위해 勢道家門 중심의 반동정치를 감행하였으며, 지방 관료들은 망해가는 집안 꼴을 바로 잡으려하기는커녕 한몫 재산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권문세도가의 득세 속에 인재를 뽑는 과거제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과거시험 가운데 소과(생원, 진사) 급제엔 3만 냥, 대과 급제엔 10만 냥의 뇌물이 필요했다. 과거에 합격한 뒤 수령이 되어 임지에 부임할 때 또 돈을 바쳤다. 그 가격이 무려 1만 냥에서 100만 냥까지에 이르렀다. 동학혁명을 발생시킨 趙秉甲의 학정이 그냥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인 모순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은 일종의 人災였다. 인재는 늘 자연재해를 극성하게 만든다. 인구 1천만도 안 되는 나라에 3,4년에 한번 꼴로 수십만의 기민이 발생하는 가뭄이 닥쳤다. 1821년부터 22년 사이에는 전국에 퍼진 輪疾(진성콜레라)로 ‘그때 이야기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떨 정도로’ 처참한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텅 빈 마을, 골짜기 마다 진동하는 시체 썩는 냄새, 암행시찰을 나선 어사님조차 울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요즘도 애용되는 ‘染病(장티푸스)할 놈’, ‘염병하네’ 라는 토속어는 예사스런 욕이 아니었다. 염병은 저주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 위기는 농민들로 하여금, ‘이놈의 세상 언제나 망하나, 난리나 났으면 좋겠네’ 하는 식의 현실부정 의식(末世意識)을 강요하였다. 어떤 농부는 배냇물도 채 안 가신 아이 몫으로 군포를 물린 아전의 횡포에 항의하여 자신의 양물을 자르기도 하였다.(정약용, 哀絶陽)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노부모조차 편히 모실 수 없는 세상, 이미 살맛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러자 농민들 사이에서 불국정토의 건설자이신 미륵님과 濟世의 성인이신 鄭眞人의 출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天地開闢의 뜻을 담은 동학사상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는 엄청난 역사변화를 암시하는 일련의 징후였다.
여기에 더하여 1876년 문호개방으로 경제생활이 파탄지경에 이르자 농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만 갔다. 값싼 면제품의 대량 수입, 쌀의 대량 유출 등은 일부 매판 상인이나 지주들을 살찌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은 土布 생산 위축, 쌀값 불안정 등으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개항 이후 심해진 청국이나 일본 상인의 횡포는 농민들의 원초적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19세기의 농민들은 봉건 지배 권력의 부패와 무능에 항의하여 避役저항, 掛書 및 山呼투쟁, 上訴투쟁, 무장투쟁 등 여러 가지 형태와 내용의 반봉건운동을 전개하였다. 關西농민전쟁(1812년), 壬戌민란(1862년) 등은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농민봉기였다. 하지만 무계획하고 비조직적인 民亂만으로 세상을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조선 왕조권력은 자신들의 지배위기를 물리적 폭력, 심지어는 외세의 힘까지 빌어 타개하고자 했다. 1902년 고종 황제 탄신일을 그린 정덕황의 남가몽을 보면 당시 황실의 주변이 어떠했나를 실감할 수 있다. “ 기생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악공이 북을 치고 피를 불기를 한결같이 세자의 탄신 때와 같이 하였다. 상을 겹겹이 차릴 필요가 없었으나 고기는 산처럼 쌓아놓고 포는 숲처럼 준비하였으며(肉山脯林) 술은 샘처럼 많아 잔치를 즐기니(酒泉需雲) 보통 때의 수리상에 비하면 10배가 넘는 가지 수였다. 또 상에 진열한 것으로 논하면 周尺으로 1척 이상 높이 진열되었다. 내직 3000명의 관료에게 균일하게 지급하여 함께 먹게 하니, 흡사 함께 떼 지어 강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도 같았다. 각자가 배를 채우되 한 사람도 모퉁이에 돌아앉아 탄식하는 자가 없었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덕이여.” 막가는 세상이었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이 같은 위기 상황에 대응한 농민들의 주체적인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었다.
동학농민 전쟁은 초기에는 惑世誣民罪로 사형당한 교조(최제우, 1824-1864)의 원한을 푸는 敎祖伸寃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대중집회(삼례, 보은 집회) 과정에서 집단의 위력을 실감한 몇 명 앞선 농민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반역을 꿈꾸기 시작했다. 1893년 3월(음력)에 열린 제2차 보은 집회와 금구(원평) 집회 때부터 남접파 지도자들은 일본과 서양의 배척(掃破倭洋)을 주장하는 등 종교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천지개벽의 뜻을 담은 동학사상은 농민들의 단순한 말세의식을 목적의식적인 변혁의식으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를 했으며, 또 동학교단의 包接조직은 다수의 농민들을 동원, 결속하는 주요한 매개 고리가 되었다. 동학 농민군들은 “폭정을 바로 잡아 백성을 구하고(除暴救民), 나라를 보호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자(輔國安民)”는 뜻이 담긴 창의문이 발표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 ‘執綱政治’를 통해서, 탐관오리 및 불량 양반 엄징, 노비문서 소각 및 천인의 대우 개선, 청상과부 개가, 무명잡세 폐지, 公私 부채 무효화, 토지 平均分作 등 자신들의 요구를 스스로 실천하려 했다. 잠시나마 농민들은 “티 없는 맑은 영원의 하늘”을 마주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이에 봉건 통치배들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반민족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1894년 5월 청국군은 아산지역으로 상륙하였으며, 일본군은 인천을 거쳐 경복궁을 점령한 뒤 조선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무력했다. 弓弓乙乙을 새긴 부적도 侍天主 造化定하는 주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동학농민 전쟁이 끝난 후 전여세력의 일부는 뒤이어 일어난 재야유생 주도의 초기 의병(乙未의병)에 가담하였다. 농민전쟁의 역사적 지향은 대한제국 시기에는 英學黨 , 活貧黨 활동, 일제시대에는 노동자 농민의 민족 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
(5) 우물 안 개구리처럼 외세를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보다 더 비참하게 산산 조각났다. 또한 우리 민족의 자긍심도, 민족이 전면적으로 개조되기 전에는 전혀 희망이 없을 정도로 추락하였다. 정용화 교수는 조선 망국의 원인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서양문화를 배척한 위정척사론은 윤리의 기준을 적용해 정치를 판단하는 정치의 윤리화라는 오류에 빠졌고, 서양문명을 추종한 개화파는 자주독립이라는 목적보다 문명개화라는 수단을 우선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둘은 결국 이분법적 인식구조에 갇혀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찬반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의 반지성주의와 일맥상통한다.
둘째, 외세 활용의 실패이다. 당대 조선의 위정자들은 소국의식과 변방의식에 사로잡혀 서구열강이 개항을 요구하자 “조선은 중국의 신하국이므로 중국의 허락 없이 개항할 수 없다”며 외교 정책의 결정권을 중국에 미루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또 임오군란 이후 위안스카이라는 총독 아래 중국 청나라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인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일본군의 자동개입을 알면서도 기득권 유지를 위해 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셋째, 국내 역량결집의 실패다. 이는 왕권을 제한하는 조선의 臣權 정치체제와 2,3일이 멀다하고 벼슬을 바꿀 정도로 심각한 매관매직, 그리고 조정정책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 등 정치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의 부재였다.
넷째, 제도화의 실패다. 국민통합의 제도로서 의회 도입의 불발, 지도층의 근시안적 식견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개혁의 지체, 인재양성 제도의 부실 등이다.
(6) 이런 구한말의 쓰라린 역사의 실패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기억할 것은 언제나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도전과 응전에서 문명을 만드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뿐만 아니라,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힘을 합쳐 실천하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으며, 그들이 어느 정도의 식견과 열정을 가지고 사회에 참여하는가가 역사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구한말의 우리 지도자들은 단순한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單價性의 의식은 사람에게 울분과 짜증을 일으킨다. 단가성의 사고는 획일성의 사고로 이어지고 이것은 전쟁을 야기한다. 획일성의 사고가 분열될 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단가성의 철학은 熱狂性(fanatism)을 가져오고 울분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15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구한말의 선조처럼 너무나 강한 흑백적 사고에 빠져 있다. 보수는 보수 쪽만 바라보고 진보는 진보의 울타리에 갇혀 있다. 그 중간과 상대방과의 교류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국 의식과 지성의 빈곤이다. 이런 흑백의 정신으로는 올바른 사회변화를 창조적으로 꾀할 수 없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께 끌고 와서 다급하게 답변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그 여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면, 예수 자신이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고소하려고 하였다. 그 반대로 예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율법대로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라고 외친 예수 자신의 주장에 어긋난다고 그를 비난할 참이었다. 이런 경우 언뜻 보아 답변은 둘 중의 하나(either-or) 밖에 없을 것이다. 즉 예 또는 아니오(yes or no)이다. 그러나 이 절박한 순간에 예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다른 답변을 하였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공자도 사고의 유연성을 강조한다. “군자가 천하에 살면서, 편견에 의해 무조건 긍정 하거나, 언제나 부정으로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옳음을 따를 뿐이다.(子曰 君子之於天下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것은 綱常節槪파와 參與業績파 사이의 和諍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공자의 중도 현실의식인 時中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논리는 신라의 和諍국사 원효에게서 가장 체계적으로 들어난다. 그는 우선 화쟁의 동기를 말한다. 여러 가지 공공의 이론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혹은 내기 옳다고 주장하고 혹은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주장한다. 또 혹은 내 설명만이 정당하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모순이 서로 다투기를 수십 년에 이르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立과 破, 긍정과 부정, 同과 異, 유와 무가 본래 하나인 一心으로 귀의함을 밝히고 있다. “세우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 깨뜨리지 않는 바가 없으면서 도리어 인정하고 있다. 도리어 인정한다는 것은, 저 가는 자가 가는 것이 다하여 두루 세움을 나타내며,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주는 자가 주는 것을 다하여 빼앗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을 모든 논리의 조종이며 모든 쟁론을 평정시키는 주인이라고 말한다. (無不立而自遺 無不破而還許 而還許者 顯彼往者往極而偏立 而自遺者 明此與者 窮與而奪 是謂諸論之祖宗 羣諍之評主也)”
사실 우리 철학은 화쟁철학의 역사이다. 율곡도 「答成浩原書」에서 理氣之妙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원효와 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아니하여 一物이다. 그 구별되는 바는 리는 무형이며 기는 유형이다. 리는 無爲며 기는 有爲이다. 무형, 무위하여 유형, 유위의 主가 된 것은 리이다. 유형, 유위하여 무형, 무위의 器이가 된 것은 氣이다. 리는 무형이요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通하고 기는 局하다. 리는 무위요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발하면 리가 그 위에 탄(乘)다.” 리와 기는 결단코 다른 것이지만(決是二物), 그렇다고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不可分開). 리와 기는 본디부터 합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처음으로 합쳐진 시간이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에 리와 기를 별도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리와 기는 서로 섞일 수 없지만(不雜), 그렇다고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不離) 때문에, 기가 발하면 리가 그 위에 타는 것이다. 이것이 율곡의 氣發理乘說이다.
지성인의 사고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고가 아니다. 지성인은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오래 고뇌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답변을 하기 전에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되어 있다. 예수는 진퇴양난의 위기상황에서도 성급하게 답변하려고 하지 않고 잠시 여유를 갖는다. 그리고 결국 깊은 고뇌와 지혜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지성인은 자극이 오면 즉시 반응하는 동물적인 행동이 아니라, 모호함이 주는 두려움을 참고, 두루 아우르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한다. 만하임(K. Mannheim)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말한다. “모든 역사적 상항과의 대결에서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소승적으로 보지 말고 그때그때마다 국부적으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갈등을 일별할 수 있는 사상이 필요하다. 소승적으로 하나의 국부적 문제만 집착하여 전체 사회의 주어진 여건의 역학 관계를 도외시할 때 그러한 사회적 지성은 다른 집에 난 불은 알아도 그 불이 곧 자기 집으로 번질 줄을 알지 못하는 바보와 같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변혁의 시기에는 원리의 면에서 경의적인 시야의 확대를 가져다주는 철학이 필요하다.”
결국 사람 중에서 성숙한 사고를 하는 지성인들이 역사를 끌고 가는 중추 세력이다. 정치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국민들이, 한쪽의 이념에 편향적으로 물들지 말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비겁하게 머리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몸소 악을 뿌리 뽑고 선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실천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요소를 늘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經度(social longitude)와 사회적 緯度(social latitude)이다. 사회적 경도는 불변적이고, 가치의 기준이며, 위계적이고, 이상적이고, 수직적이다. 이에 비해 사회적 위도는 가변적이고, 평균적이고, 현실적이고, 수평적이다. 사회적 경도가 없는 사회적 위도만 생각하는 사회는, 우리 교육의 하향평준화처럼 저속화되고, 대중화되고, 평준화 된다. 평등은 가치 있지만 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평등화의 이름 아래 무시하려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참으로 실현하기 어렵지만 아름다운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극단화하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나 도둑놈의 구별이 없어진다. 사회에 어른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행동은 동물처럼 추악하게 타락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거꾸로 사회적 위도를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경도만 중시하는 사회는 사회가 관료화되고, 위계화되기 쉽다. 그러면 사회는 경직되고, 구성원들은 온갖 무거운 형식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쌓여 생기를 잃게 된다. 그런 경직된 사회는 이질적인 문화나 가치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개방을 거부하고 폐쇄한 사회가 계속 건강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7) 과거의 일은 과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질곡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아마 그 이유 중 어느 정도는 변화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반도 국가로 세계 4강 속에 위치하고 있다. 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지나가는 길목도 되지만, 로마처럼 모든 세력을 아우르는 중심 국가도 될 수 있다. 불행이도 우리는 그런 영광을 누려보지 못하고 늘 주변국가로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 이제 이런 변방적 역사의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한반도는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극동아시아의 조그만 은둔의 땅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저돌적이고 야심만만한 항구처럼 보인다. 또 한반도는 온난전선과 한랭전선이 만나는 경계 같기도 하다. 경제적으로는 다 같이 자본주의를 지향한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념적으로는 한쪽은 중국과 러시아라고 하는 독재국가가 포진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하는 민주국가가 포진하고 있다. 남북한의 휴전선은 그런 모순적인 전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한반도는 어떻게 보면 이런 국가들을 휩쓸고 있는 태풍의 눈 같기도 하다. 한 때 해가 떨어지지 않는 영국이 지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우겼듯이, 사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임이 틀림없다. 수도 서울은 세계적인 대도시네트워크의 중심도시이며, 서울을 중심으로 (북은 블라디보스토크, 봉천, 하얼빈, 남은 홍콩, 타이베이, 동은 도쿄, 오사카, 서는 북경, 상해) 반경 2000Km 이내의 지역에 무려 세계 인구의 1/4 이상이 살고 있다. 또 희망적인 것은 현재 세계를 제패한 나라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 그리스 -> 로마 -> 서유럽대륙 -> 영국 -> 미국 -> 일본. 그런 점에서 한국은 세계 중심이 될 동아시아의 심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지난 구한말 이래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세력의 분파들이 밑뿌리에서부터 하나의 공통적 집합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조선 왕실은 고종이나 대원군이나 민비가 힘을 합치지 못했다. 일반 백성은 양반과 양민이 지혜를 짜내어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지 못했다. 해방된 종들도 국가에 힘을 보태지 못했다. 또 혁명을 일으킨 동학농민들은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으나 왕실은 그들을 철저히 적군처럼 외면했다. 이렇게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만일 그들이 외세의 세력에 대항하여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국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상과 종교적인 비전, 신분과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쉽게 하나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식에 있어서는 ‘외세로부터 민족을 구하고,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각 입장들은 내재적 타당성을 넘어서 하나의 공통적인 저수지로 흘러들었어야 한다. 그런 공통적인 저수지란 새 나라를 형성할 수 있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족의 共同善(common good)이다. 그런 공동선을 정치 주도 세력이 만들어내지 못했다. 구심점이 사라지고 목표도 없는 상태에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사회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