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중용에 대하여)

이효범 2020. 9. 11. 08:38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중용에 대하여)

 

구녕 이효범

 

모두들 안녕하시죠. 위세 당당하던 거대한 태풍 마이삭, 하이선 등은 지나갔지만, 조그만 바이러스인 코로나는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지칠 줄 모르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면 국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방역을 더 강화했다가, 안정되면 경제적 파탄을 막기 위해 고삐를 풉니다. 시계추처럼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하면서 중심을 잡아야 하니, 최선의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기적인 모임인데 계속 열어야 하나, 아니면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건너뛰어야 하나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회원들이 열자고 결정해도, 나는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단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中庸을 생각해봅니다. 중용은 유학에서 강조된 행위기준입니다. <中庸章句>를 쓴 주자는 서문에서 道統 이야기를 합니다. 전설적인 중국 성왕인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정성을 다해 그 중도를 지켜 나가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순 임금은 다시 우 임금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잘 드러나지 않으니, 정밀하게 살피고, 도심을 한결같이 보존하여 정성을 다해 그 중도를 지켜 나가라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유학에 의하면 제왕이 천하를 통치하는 준칙 그리고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적 법칙은 중용인 것입니다.

중용은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것 즉 過不及 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중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한 산술적인 중간은 어떤 의미에서 악이지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용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도덕적으로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선을 가리킵니다. 공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를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선 군자는 중용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군자는 중용을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역행한다.(君子中庸 小人反中庸)” 그리고 군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질이 문보다 지나치면 촌스럽고, 문이 질보다 지나치면 겉치레에 흐르게 된다. 문과 질이 알맞게 조화를 이룬 뒤에 군자답게 된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여기서 공자는 인간이 타고난 소박하고 선한 바탕인 질과 후천적인 교양인 문이 조화를 이룰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조화가 일종의 중용입니다. 맹자는 공자를 時中之道를 실천한 성인으로 평가합니다.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만두어야 하면 그만두었으며, 오래 머물러야 하면 오래 머물렀고, 빨리 그만두어야 하면 빨리 그만둔 인물은 공자였다.”고 말합니다. 이런 공자는 세상일에 대하여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없고, 반드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없이, 오직 도의에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무조건 아니라고 반대하거나, 언제나 아첨하여 무조건 긍정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입니다. 시대적 상황에 적절히 대처한다는 時宜性으로서의 중용은, 융통성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權度 개념과 연결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중시한 楊朱는 털 하나를 뽑아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爲我主義(利己主義)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墨子는 유교의 차별적인 사랑에 반대하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라는 兼愛主義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마가 닳고 발꿈치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천하가 이롭다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에 맹자는 양주의 이기주의는 군주를 무시하는 것이고, 묵자의 박애주의는 부모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름 아닌 금수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런 양 극단에 대해서 子莫은 중간을 고집하였습니다. 이에 맹자는 을 취하되 권도(변통)가 없으면 그것은 승냥이나 늑대 같은 자로, 하나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고 질책하였습니다. 권도란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녀가 직접 손을 잡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이런 경우까지 융통성 없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고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맹자가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을 극히 미워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만을 치켜세우다가 백을 버리게 되어 도를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자는 말합니다. “권은 저울의 추로서 물건의 가볍고 무거움을 달아서 그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다. 가운데를 잡지만 권이 없으면 하나로 정해진 가운데에 교착하여 변함을 알지 못한다. 이 또한 하나를 고집하는 것이다. 가운데를 고집하는 것은 時中에 해가 된다. (...) 도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중이며, 중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권이다.”

불교도 유학처럼 중도를 강조합니다.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전의 궁전에서 극단적인 쾌락의 삶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피골이 상접하도록 고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쾌락과 고행이라는 극단적인 두 길은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행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지친 몸을 끌고 네란자라강으로 가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악마를 물리치고 깊은 삼매에 들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니르바나로 가는 올바른 길은 바로 중도를 가리킵니다. “지극히 천한 欲樂의 행위와 범부의 행동을 하지 말아라. 또한 스스로 별로 성스럽지도 않으며 의롭지도 않은 고행을 구하지 말아라. 이 두 가지를 떠나면 그것이 중도가 된다.” 그런데 이런 중도에는 正道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시불교에서 정도란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이라고 하는 8정도를 뜻합니다.

8정도에서 正見이란 사물의 본래 모습을 바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캇차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입장에 의거하고 있다. 이다. 그렇지만 캇차야나여, 만약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써 세계를 유심히 관찰하면, 세상에는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무도 없고 그렇다고 영원불멸하는 유도 없다. 캇차야나여, 모든 것이 유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극단적인 설이며, 모든 것이 무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의 극단적인 설이다.” 유와 무가 모두 극단이라면 그러면 중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緣起입니다. 세상이 연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 부처가 지혜의 눈으로 본 존재의 실상입니다.

유학과 불교가 강조한 이런 중용의 가치를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분명히 목표가 있고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인간의 궁극 목적이고 최고선(summum bonum)입니다.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탁월함)이 필요합니다. 덕에는 이론적인 덕과 실천적인 덕이 있습니다. 이론적인 덕은 관조적 내지 이론적 삶의 탁월성입니다. 관조를 통해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통찰한 진리를 조용히 사색할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실천적인 덕은 품성의 탁월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적 상황에서 중용을 실천한다면 성격이 고귀해질 수 있고, 그러면 결국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의 덕은 용기, 절제, 관후, 긍지, 온화, 재치, 우애, 정의 등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포에 빠져 햄릿처럼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돈키호테처럼 만사에 두려움 없이 무모하게 덤벼들어 만용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도덕적 의미를 직관하고 올바르게 추론하여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분별하여,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용이고 이런 중용의 덕인 용기가 몸에 밸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용기인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점을 시인합니다. “덕을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있어서나 간에 그 일의 핵심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의 중심을 발견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원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으며 돈을 남에게 주거나 아낌없이 쓸 수 있는데, 이런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꼭 주어야 할 사람에게, 적당한 양만큼, 꼭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미덕은 드물며 또 상찬할 만하고 고귀하다.”

중용이 문제해결이나 행복을 위해서 유효한 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이나 문제에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는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기독교는 절대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중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소망, 믿음, 사랑이라는 가치는 많이 나와도 중용이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또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목표에 거의 미쳐 사는 것이 미덕일 수 있습니다. 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사인 볼트가 달리는 것과 내가 달리는 것이 다르듯이, 어떤 일을 할 때 젊은이의 중용과 노인의 중용이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상태가 과연 중용의 상태인지 알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識見 있는 사람의 직관력에 의해 중용이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애매한 답변입니다. 식견이란 결국 전문성을 말합니다. 인간은 신처럼 미래에 일어날 사태까지 알 수 있는 그런 全知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 통달한 사람이 깊게 오래 생각하고, 고뇌에 차서 결단한다면, 그것이 곧 중용이고, 그 시점에서는 그것이 가장 믿을 만 할 것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질투나 화 같은 욕정을 참고, 내가 골프 칠 때 자주 빠지는 이판사판이나 자포자기로 막 나가려는 감정을 조절하면서, 또한 쾌락과 같이 한없이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유혹을 끝내 거부하면서, 비록 약하지만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평소에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는 것이, 악보다는 선 쪽으로 가는 즉 중용으로 가는 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결국 오랜 곡절과 희생을 겪게 되겠지만 선은 악을 이길 것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는 때리는 쪽보다 맞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에서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잠을 잘 잘 수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긴장되는 요즘 그래도 잠만은 푹 주무십시오.

202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