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63, 근본적 변혁)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63, 근본적 변혁)
o 근본적 변혁
구녕 이효범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스럽게 살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기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 중에 유대인을 선택하여 사명을 주었다.
유대인은 열방의 빛이 되고,
하느님의 목적을 알리는 전령이 되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 책임을 다하면 복을 내릴 것이고,
과업을 이루지 못하면 재앙이 따를 것이다.
예수의 시대 유대인은 로마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다.
유대인은 다윗처럼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는 ‘기름을 바른 자’인 메시아는,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인간을, 죄의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사야가 말하는, 고난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했다.
공자는 열정을 가지고 14년간 천하를 주유했으나 철저하게 실패했다.
68세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면을 살려 고국으로 귀환했다.
이듬해 아들 공리가 50세 나이로 죽었다.
부인 견관씨는 공자와 이혼한 데다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공자가 가장 아꼈던 안연이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공자는 탄식했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그러나 공자는 70세에 이르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곡부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자 공자는 말했다.
“도를 이루려는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났구나!”
공자는 절망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명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다.”
공자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안되지 안돼.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인가?”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홀로 고집스럽게 『춘추』를 써 나갔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 힘으로 세상을 설명하였다.
이성이 발달하면서 철학이 시작되었다.
초기 자연철학은 사물의 궁극적 요소를 탐구했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그것을 물이라고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라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수라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공기, 물, 불, 흙이라고 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고 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Nous)의 작용이라고 했다.
아시아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했다.
스파르타의 육군과 아테네의 해군이 연합하여 승리했다.
40만 명의 아테네는 지중해의 중심 도시국가가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달성될 수 없는 목표는 없다고 자신했다.
지중해 전역에서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 아테네로 몰려왔다.
그들을 가르치는 ‘슬기로운 사람’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소피스트들이 이성의 법정에 세우지 않은 철학적 문제는 없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성찰을 인간사로 전향시켰다.
개인 및 공공의 영역에서,
좋은 삶의 조건을 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일체의 타협과 양보 없이 전 인생을 걸고, 소피스트들과 논쟁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고발되어,
최초의 철학적 순교를 당했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고, 범천의 권유로, 법을 설하기로 결심했다.
녹야원에서 최초의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였다.
중도(中道)를 선언하고,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밝혔다.
결코 권태하거나 이완되는 일 없이 45년간 전도에 진력했다.
한 브라만이 격렬하고 험악한 말로 비난했다.
“젊은이들을 충동질하여 출가하게 했고,
브라만도 아닌 자가 교법을 설했다.”
붓다가 조용히 답했다.
“그대는 나를 헐뜯고 비난해도, 나는 그 대접을 안 받을 것이니,
그것은 도로 당신의 것입니다.”
서민들에게 가서 서민들에게 설했다.
“크고 작은 여러 강이 있다. 이들이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이름을 버리고, 단지 대해(大海)라고만 불린다.
그와 같이 사람은 크샤트리아,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의 사성(四姓)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여래가 설하는 법과 율에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이름을 버리고, 단지 사문 석자(釋子)라고만 부른다.”
붓다 나이 80이 되었다.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고 쇠하였다.
낡은 수레는 가죽끈에 의해 겨우 움직이듯이,
나의 몸도 가죽끈의 힘으로 겨우 움직이는 것과 같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붓다는 더욱더 강인하게 교법을 설하였다.
“참으로 아난다여, 바로 지금이나 또 내가 죽은 뒤이거나,
스스로를 등명(燈明)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하되, 남에게 의지하지 말며,
법을 등명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되,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
이 도를 수행코자 하는 자야말로, 우리 교단에 최고의 자라에 있는 자이다.”
붓다에 의하면, 나야말로 나의 주인이고, 나야말로 의지처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붓다의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