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 2023. 10. 15. 23:04

o 시 쓰기와 걷기 4

 

구녕 이효범

 

4.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네카어강의 카를 데오도어 다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산 중턱에 철학자의 길이 나 있다. 강 건너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대학 그리고 구시가지가 그림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산보()하기에 최선의 길이다. 세계에는 도처에 이런 길이 많다. 일본 교토에도 있고, 덴마크 코펜하겐에도 키르케고르가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산보는 빈둥거리는 걷기이다. 일정한 목적도 없고 의무도 없다. 급할 것도 없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시간이 돈이라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금기와 죄악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산보의 시간에 시와 철학이 나온다. 위대한 창의성이란 어느 것에도 매여있지 않은 빈둥거림에서 나온다. 몸이 하품에 뒤틀리고 정신이 외로움에 지겨울 때, 오히려 평소에 갖지 못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이 시와 철학의 창조적 탄생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에서 시()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런 나를 건드리더군./ 나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나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철학자의 길은 산보에 어울리는 길이다. 물론 도시에도 산보할 수 있는 길이 많다. T.S.엘리어트의 장시 ‘J. 앨프래드 프루프록의 연가에 나오는 길은 분명히 도시의 한가한 길이었을 것이다. “자 우리 가볼까, 당신과 나와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가볼까, 한산한 어느 거리,/ 싸구려 일박 호텔의 불안한 밤의 속삭거리는 으슥한 길,/ 귤껍질 흩어진 톱밥 깔린 레스토랑을 지나:/ 위압적인 문제로 당신을 인도할/ 음흉한 의도의 지리한 논의처럼 잇단 거리들을 지나 ---// , 묻지 말아다오, ‘그것이 무엇이냐?’./ 우리 가서 방문이나 해보자.”(일부) 그러나 어딘가 창조적 산보에는 강, 호수, , 바닷가, 계곡, 폭포, 광야, 들판, 고원, , 야산, 농촌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길들을 생각하면 어릴 적 농장에서 성장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어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 나는 한 길을 또 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