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시를 지어봅시다. 5
o 가을입니다. 시를 지어봅시다. 5
구녕 이효범
1-5. 시는 고도의 직관으로 은폐된 진리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참선을 통해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평생을 정진했던 스님이 깨닫는 순간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오도송(悟道頌)을 내뱉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조단경』에는 신수스님과 혜능스님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됩니다. 5조 홍인스님이 이제 법을 물려주려고 제자들에게 깨달은 바를 알리라고 선언합니다. 제자 중에 가장 학식 있고 존경받는 신수는 벽에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수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항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막사야진애(莫使惹塵埃, 먼지와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라는 게송을 써붙입니다. 이에 혜능은 그 옆에 다른 오도송을 씁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원래 없는 나무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명경은 또한 대가 아니니)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으므로)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서 먼지와 티끌이 일어나리)”
우리는 보통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예술은 미를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이런 상식을 비판합니다. 그는 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율을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라는 이런 설명 방식은 양적(量的)인 세계에만 가능하지, 영혼과 같은 질적(質的)인 세계에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폐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과학이 아니고 사실은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예술 중에서도 ‘존재의 집’인 언어를 사용하는, 그중에서 시야말로 나무, 강, 동물 같은 존재자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온전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다 간 프리드리히 휠덜린(Friedrich Holderlin)의 시를 해설하고 찬양했습니다. 하이데거가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던 휠덜린의 시에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인간의, 신적인 아름다움의 첫 번째 자식은 예술이네. 예술을 통해서 신적 인간은 스스로 회춘하고 되풀이한다네. 신적 인간은 스스로를 느끼기를 갈망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마주 세우지. 그렇게 해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신들을 부여했다네. 왜냐하면 태초에 인간과 그의 신들은 일체였고, 제 자신을 알지 못했지만 영원한 아름다움이 거기에 존재했던 것이네. -내가 신비로운 일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존재한다네.- 신적 아름다움의 첫 아이는 예술이라네. 아테네 사람에게는 그러했다네.(<휘페리온 130>, 프리드리히 휠덜린)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가 즐겨 애독한 헤르만 헤세도 소설 못지않게 좋은 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는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시도 있습니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생의 계단>, 헤르만 헤세)